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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미완의 삶

프린세스 메이커를 기억하시나요?

by 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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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딸 키우기 시뮬레이션 게임을 좋아했다. 너무 재밌어서 하루 종일 그것만 한 나머지 며칠 새 서너 명의 딸을 키워낸 적도 있었다. 내가 이름을 지어 키우기 시작한 게임 속의 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자랐다. 학자, 검객, 사제, 술집 마담, 왕실의 정부 등등...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도무지 '프린세스'가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프린세스'는 어떻게 해야 탄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 시절 동네 친구는 프로그램을 조작하여 딸의 모든 능력치를 만렙으로 올려놓은 채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지금은 방법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실을 듣고 천재 친구의 조작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벌써 신이 났다. 드디어 공주를 키울 수 있겠군. 나는 모든 능력치가 만렙으로 채워진 딸아이를 밥도 안 먹고 열심히 키웠다. 얼른 재우고 얼른 깨워서 성인이 되는 날까지 공부도 시키고 무술도 시키고 공주가 되기 위한 기품 있는 예도도 적절히 가르쳤다. 나의 사이버 딸이 중간중간 양육자인 내게 말하는 모든 대화는 빠르게 스킵했다. 이제 고지가 코앞이었다. 드디어 공주의 탄생을 보게 되겠군 꺄악... 엥 이게 뭐야.


능력치 만렙의 공주가 되어있어야 마땅할 내 딸은 이미 내가 한번 키워본 적 있는 학자가 되어 평생 학문에 매진하겠다며 학사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해요를 외치며. 뭐가 잘못된 거지. 공주의 탄생이란 애초에 없는 게 아닐까. 상심한 어린 보람은 한동안 프린세스 메이커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진짜 딱 한 번만 하고 다신 안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딸을 탄생시켰다. 조작은 없었다. 공부도 시키고 무술도 시키고 술집 아르바이트도 골고루 시켰다. 시험 점수도 안 좋았다. 하지만 재미나게 이것저것 시켜보며 처음으로 그 게임을 천천히 즐겼다. 게임 속 딸은 아프기도 하고 나가서 놀다 다치기도 하며 열심히 열여덟 해를 보냈다. 모두가 예상하셨겠지만, 그렇다. 나는 그날 드디어 공주가 된 딸을 만날 수 있었다. 특별한 거 한 게 없는것 같은데 뭘까. 컴퓨터 화면 속에 공주가 된 내 사이버 딸은 눈이 부시게 예뻤다.


딱 10여 년 전. 대학생 보람은 10년 후에 어느 하나의 분야만큼은 프린세스가 되어 있을 자신의 모습을 꿈꾸었다. 딱 지금의 내 나이. 이 나이가 되면 뭐 하나는 이뤄놨을 것 같았다. 든든한 울타리를 치고 남편과 함께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고 있던가. 내가 하는 일에서 견고하게 자리 잡아 높은 위치에 있던가. 그 둘 중 하나, 혹은 그 둘 다를 생각했다. 그 10여 년이 흐르고 현재. 그 시절 꿈꾸던 두 개의 왕관은 보기 좋게 비껴나갔지만 예상보다는 꽤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인생에서 아직 나에게 주어진 숙제들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한때 이 사실이 너무 속상하고 조급해서 일을 그르칠 때마다 나 자신을 비관하며 방황도 많이 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왜 방황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내가 원하는 구체적인 목표나 방향이 없었다. 그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한 삶의 숙제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하다 꿈의 프린세스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이미 조작된 프로그램으로 만렙이 채워진 채 움직이는 게임 속 여자 아이처럼 그저 편하게 편하게 가고 싶었다. 두 마리 토끼는커녕 한 마리도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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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유달리 힘들었던 지난 일 년간, 장대비가 쏟아져 질퍽 거리는 땅을 계속 짚고 일어나려다 연거푸 넘어지는 기분이었다. 비가 그치고 땅이 마를 시간을 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뒤처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 넘어지니 별 수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떠서 땅이 마르길 기다렸다. 그리고 겨우 땅을 짚고 일어나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너무 아팠지만 천천히 걸었다. 그랬더니 선물이 주어졌다. 보이지 않던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 어떤 기회들이 주어지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 이왕이면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 내가 무엇을 원하고 뭘 하면서 살고 싶은지 아주 조금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 절친한 친구가 물었다. " 너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은 뭐야? "


예전 같으면 듣자마자 벙쪄있을 질문이었겠지만 조금은 달라진 모습의 내가 대답했다.



아직 완성된 것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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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삶. 인생에 아직 남은 숙제가 많다는 것. 견고한 사랑과 일이 너무나도 가지고 싶었던 나는 이제야 반쪽 자리가 아닌 완전한 온 쪽의 내가 되기 위해 느릿느릿 나만의 보폭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다. 원하는 목표를 인생의 내비게이션에 찍어둔 채. 조급함은 내려놓고 조금은 주변의 풍경도 둘러보는 여유를 즐기면서. 나는 앞으로도 실수할 거고 비가 와서 땅이 질퍽이면 또 넘어질 것이다. 또 한 번 사랑 앞에서 바보가 될 테고 일을 하다가도 내 무능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책상에 머리를 찧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아니 어쩌면 끝까지 완성되지 못할 '미완의 삶'이 나를 움직인다. 내게 남은 삶들이 어떨 땐 지겹고 떨쳐버리고 싶지만 한편으론 기대되고 설렌다. 그 길이 어디든 내가 있는 곳이 곧 '보람'있는 삶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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