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퇴근 후 친한 동료와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생각 제조기인 나답게 그날 역시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일, 사랑, 내 감정, 하루하루 간다는 것의 뭔지 모를 불안감 혹은 설렘. 잠들기 전 이런저런 생각으로 뒹굴뒹굴하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마셨던 맥주를 열심히 자랑했다. 그러자 한 지인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 밤은 하나인데 생각은 여럿이구나. "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어떻게 알았지. 고작 맥주 사진 한 장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올린 사진에서도 나의 생각 많음이 뿜어져 나온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는 평소 음유시인처럼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온 그의 메시지가 반가워서 안부를 묻자 잘 지낸다는 대답과 함께 돌아온 메시지.
밤도 하나 생각도 하나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살아
때론 단순하고 생뚱맞은 메시지 한 통, 혹은 말 한마디가 하늘의 계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때 불면증을 굉장히 오래 겪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그야말로 괴로웠다. 새벽까지 지친 눈을 껌뻑이며 아침을 기다렸다. 불면증이 가진 최악의 부작용은 바로 생각이 많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옛날 옛적 케케묵은 생각까지 떠올라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내가 한 실 수 다 지워버린 후 현실로 돌아오고 싶어지는 날들이 늘어갔다. 하지만 창피했던 기억도 눈물 나게 억울했던 과거도 이미 흘러간 일일뿐이고 어찌 됐든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작은 조각들이다. 지나간 과거에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두려움에 매몰되지 않고 지금 현재 여기에 집중한다는 것. 늘 마음에 꾹꾹 눌러 새기는 문장인데 생각처럼 매 순간의 실천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장 저거 하나는 실천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밤은 하나니까 굳이 생각을 할 거라면 하나만 정해서 하자. 이 엉뚱한 생각이 나에게 글을 더욱 열심히 적게 만들었다. 이 대리가 되어 살았던 반나절의 일상, 그날 읽었던 책에서 외우고 싶을 정도로 좋았던 밑줄들을 블로그에 옮겨와 한 자 한 자 내 생각을 적으며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그 아무 말 대잔치는 매일 같은 시간은 아니더라도 꽤 길게 이어져오고 있고 어느 순간 하나의 생각을 그곳에 쏟아붓고 침대에 누우면 금세 잠이 들곤 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밤은 하나뿐이다. 그간 숱하게 많이 지나온 많은 밤과 무수한 생각들. 지금의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함께 공유할 가족이 있고 좁고 깊은 관계의 내 사람들이 있고 내 일이 있고 주어진 역할이 있다. 집에서는 딸 보람, 회사에서는 이 대리, 북 커뮤니티 글쓰기 모임에서는 리더님 혹은 보람님. 과연 내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저장되어 있을까.
하루하루 '보람'있는 삶을 꿈꾼다. 가치나 자부심을 느낀다는 사전적 의미의 '보람' 말고 나 자신이 온전히 현재를 살아낸 하루.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닌 '나'로서 살아낸 진짜 '이보람'이 있는 삶. 밤이 되면 아쉬운 점보다는 감사했던 점을 더 많이 떠올리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로 온전한 내 1인분의 몫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만의 소신과 주관이 있어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아니, 꺾일 정도로 흔들리더라도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의지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 밤도 화살기도를 하며 잠이 든다.
계속 나로 살게 해 주세요.
어떤 일에도 기죽지 않게 해주세요.
'보람'있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아니 그냥 내일...
늦잠 자지 않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