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
“여기예요. 이 방에서 쉬시면 됩니다.”
겉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뚜막이 덩그러니 설치된 부엌이 있고 다시 방문으로 이어진 구조였다.
“저쪽이 씻는 곳입니다. 화장실은 여기 문을 나가서 마당 왼쪽 끝으로 가시면 있습니다.”
연희가 부엌과 이어진 세면장과 겉문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투리를 안 쓰시는 군요?”
시우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연희에게 물었다.
“원래는 서울에서 살았으니까요. 남편 만나서 내려오고 난 뒤로 서둘러 사투리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울말을 다들 어색해 하시거든요.”
“아, 예.”
“그럼 쉬고 계세요. 이불 가져오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방에 들어가 벽을 더듬었지만 전원 스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뭔가 생각이 난 듯 허공을 천천히 더듬던 시우는 방 중앙 천장에서 내려온 백열등을 찾아 불을 켰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었다고 했던 연희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눅눅하고 퀴퀴한 느낌이 없었다. 방충망이 쳐져 있는 뒷문을 통해 낮 동안에는 잠자고 있었던 선선한 바람이 달려 들어왔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이불 가져왔어요.”
밖에서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잠시만요.”
대답과 함께 시우는 여닫이 문을 열고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며 연희에게 다가가 이불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편히 쉬세요.”
“예, 폐 끼쳐서 송구합니다.”
연희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시우도 이불을 방 안에 내려놓고 올라서서 문을 닫았다.
이불을 깔아놓은 후 시우는 곧장 씻으러 갔다. 먼지와 땀으로 온몸이 끈적거렸다. 다행히 물통에 충분한 물과 바가지가 있었고 비누 조각이 남겨져 있었다. 물통에 담긴 물에는 낮의 온기가 배어 있어 미지근했다. 마당에 있는 작두 펌프로 물을 길어 채워 놓았을 터였다. 언제적 물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밤에 시끄럽게 할 수는 없었으니 물이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갈증은 어쩔 수 없었다. 이불 속에 수건과 갈아 입을 옷을 챙겨 줄 정도로 연희는 배려심이 있는 여자였다. 시우는 연희가 준 옷으로 갈아입고 마당으로 나가 물을 한 바가지 붓고 조심스럽게 펌프질을 했다. 맑은 물이 나올 무렵 바가지에 담아 마셨다. 오염되지 않은 시골의 지하수는 차고 시원했다. 불이 꺼진 조용한 산골 마을 위로 별이 새하얗게 떠 있었다. 자리에 눕자 과거로 온 사실이 실감되었다.
공식적인 발표를 하지 않았을 뿐 과거로의 시간 여행 자체는 진작에 가능해진 기술이었다. 현재의 육체를 양자적으로 분해해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보내면 그만이었다. 인간의 인식 능력을 아득히 초월해 버린 AI는 인간이 막혀 있던 벽 앞에 어떤 식으로든 구멍을 뚫을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다른 시간대에서 인간 육체의 온전한 재생이 이론적으로 가능했지만 그 육체 안에 정신이 보존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AI가 제시한 가설에는 충분한 신빙성이 있었다.
진보한 첨단 의학 기술로도 자체의 기능을 거의 완전히 소진한 상태의 인체에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불어넣고 유지시키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AI는 인간의 기억을 가진 로봇이 될 것을 답으로 제시했지만 부자들은 그 답이 내키지 않았다. 비밀리에 인간 복제 사업을 벌이던 기업의 시설이 폭발로 사라진 후 좌절해 있던 그들은 과거로의 여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왜 아니었겠는가?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노쇠한 자들에게 새로운 모험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그들은 육체를 마지막으로 타오르게 할 약물을 써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 잘하면 새로운 기회에서 영생의 비밀을 깨닫는 계기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주 섭리에 순응하는 태도 따위는 그들에게 없었다. 그들은 차라리 꿈을 향해 이동하기를 택했다. 자신들을 승자로 만들어 준 것도 결국 지칠 줄 모르는 야망이었으니. 그들에게 로봇의 몸으로 살기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에 불과했다. 승리의 영광과 쾌락의 기쁨 모두 자신의 몸으로 누리는 것,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들이 간절히 기다려 왔던 회춘 약은 음지에서 돌아다니다 어느 날 세상에서 사라졌다. 상실감에 허덕이던 그들의 선택은 하나로 압축되었다. 외부에 공개된 적 없는 현재 인간들의 과거로의 전송 횟수는 이미 최소 수십 건에 달한 상황이었고, 그 정보를 공유 받은 부자들은 모두 함박 웃음을 지었다.
실험 주체들은 실험 대상이 된 사람들에게 인류를 위한 차원이라며 한가지 의무 사항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말이 의무이고 조건이지 지켜야 할 책임도 없었고 지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과거로의 이동이 가능하다는 증거를 확보하기만 하면 그것을 토대로 기술진은 미래를 향한 여정에도 시동을 걸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과거로 떠날 사람들에게 오래 전 과거의 형태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된 장소들 중의 몇 개를 대상으로 삼아 접근 가능성이 높은 그 중의 아무 곳에나 과거에 잘 도착했다는 증거를 남기도록 했다. 증거를 현재에 도달시킨 대상에게는 그가 미리 지정한 사람에게 100억 원의 현금을 포상으로 지급하기로 실험 주체들은 약속했다. 물론 그들이 그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 역시 없었지만 현재의 삶에서 모든 희망을 상실한 피실험체들은 과거의 삶에 희망을 걸어 보기를 택했다.
증거를 전달할 장소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악산 흔들바위 아래에 합의된 표식을 새기는 방법이 처음으로 제안되었지만 과거의 깊은 산중에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득실거렸다. 접근은 불가능했다. 다보탑과 석가탑, 석굴암처럼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킨 유물에 디그니바이 사의 로고와 전송자의 정보를 새기는 방안도 논의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띄기 쉬운 것은 전문가에 의해 보수되기도 쉬웠다. 직원들을 상주시키다시피 하여 표식을 확인하는 것도 불필요한 이목을 끄는 현명치 못한 방식이었다. 오히려 정공법을 택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누군가 오래된 고전 영화에서 차용한 방식을 제안했고 즉각 채용되었다.
마침내 어느 날 그 일이 일어났다. 50대 중반의 남자가 국책연구소를 찾아왔다. 그는 고서 하나를 쑥 내밀었다. 탄소 연대 측정으로 세종 재임 시기의 종이와 먹임이 판명된 그 책 안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을사늑약, 3·1운동, 1,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4·19, 서울 올림픽, 한일 월드컵, 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AI의 탄생과 3차 세계대전 등 과거 속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들이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모월 모일 이곳을 찾아가라는 지시 사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책 끝부분에는 책의 작성자 이름이 한글, 한자,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고, 생일과 바이가 실행된 날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실험에 참여했던 한 사람의 정보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자신이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 되었지만 굳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겠다는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시우는 실험을 진행한 국책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철훈을 통해 이 실험의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 지금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흔적이 현재에 도달한 이상, 과거로의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실행될 것이 분명했다. 죽음만을 기다리기엔 가진 돈이 너무 많았던 부자들에게 고서라는 증거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공식적으로, 정부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금지했다.
실험 주체 멤버들 중의 하나로 로열 패밀리 출신이었던 석우가 디그니바이를 창업했다. 그는 겉으로는 존엄사 대행 비영리기관을 표방했지만 국가에 의해 금지된 그 기술을 상품화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벌 계획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정부의 공식적 정책은 그에게 비공식적으로 적용되었다. 디그니바이는 사람의 DNA를 양자 정보로 바꿔 과거의 특정 시점에 전송하여 재조립되도록 하면서 몸뚱이는 그대로 남기는 기술을 완성했다. 인간 복제와 시간 이동을 결합한 그 비즈니스 모델에는 살인이 개입될 여지가 충분했다. 그 추론은 철훈에 의해 사실로 판명되었다. 석우는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한 어느 부자 고객을 그의 의사와 다르게 선사시대로 보내 버리게 한 후, 현재에 남겨진 기존의 육체가 눈을 뜨자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분노한 그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산채로 분해되었다.
시우는 디그니바이 경영진이 초래할 위험성의 크기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 목표를 위해서 기꺼이 과거와 현재를 수단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재의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인연이 끊어진 지 오래인 가족 앞으로 큰 돈을 남길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로 과거로 돌아가 디그니바이가 명령한 일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기꺼이 맹세했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섞여 존엄사로 위장되어 과거로 보내졌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수익과 설계된 과거의 혜택이 디그니바이에게 돌아왔다.
시우는 그들을 막아낼 방법을 끊임없이 강구했지만 그들처럼 비도덕적인 방식을 취할 수는 없었다. 시우는 디그니바이를 막아내기 위한 방법을 찾고 또 찾았고 마침내 찾았다. 시우는 1971년에 와 있었다.
“일어났슈? 일어난 겨?”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의 끝에서 시우는 수마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우를 그것에서 건져 낸 것은 미연이네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예,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으믄 후딱후딱 씻고 밥 묵을 생각을 해야지 젊은 사람이 게을러 터져서 모하는 겨? 얼른 씻고 저 짝으로 건너와.”
“왜 식전부터 그리 갈궈 대고 그려. 더 자게 냅두지 않고?”
홍식이네 할머니의 느리고 부드러운 음성이 이어졌다.
“아휴, 몰러. 나는 게으른 꼴은 못 봐. 바짝 움직여도 먹고 살기 힘든디 처잘 거 다 처자고 언제 뭘 해서 먹고 살 거여?”
“그만 혀. 안에서 다 듣겄어.”
“그람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내가 뭐 미쳤다고 비싼 밥 묵고 배 꺼지게 미친 년 마냥 허공에 떠들겄어?
“죄송합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시우는 할머니들의 충청도 사투리가 정겨워 웃음이 났다. 충청도로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철훈의 최선은 지켜졌다.
뒷간에 다녀와 씻고 건너가자 본채 마루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과 국이 하나씩뿐이었다. 두 할머니가 밥상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진호댁은 보이지 않았다.
“아 퍼뜩 방댕이 붙이고 묵어!”
미연이네 할머니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홍식이네 할머니가 미연이네 할머니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시우가 앉으며 말했다.
“할머님들께서는 식사들 하셨는지요?”
“우린 발쎄 묵었으니께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셔유.”
뭐라고 말하려던 미연이네 할머니를 제지하며 홍식이네 할머니가 말했다. 시우가 마루와 이어진 안방 쪽을 힐끗 바라보고 나서 수저를 들었다.
“일하러 밭에 나갔지유. 걱정 말고 들어유.”
“예, 감사합니다.”
보리밥과 된장찌개에 된장과 풋고추, 총각김치, 이름 모를 나물이 반찬으로 올려져 있었다.
“기억은 좀 돌아온 겨?”
“예, 아직 다는 아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두 분께 큰 신세를 졌습니다. 꼭 돌아와 갚도록 하겠습니다.”
“신세는 무슨. 다 도와가며 사는 기지. 자,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차비는 있어야 할 테니.”
홍식이네 할머니가 시우의 손을 잡아 오백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쥐어 주었다.
“아니, 빼빠지게 일해 갖구 번…….”
끼어드는 미연이네 할머니의 입을 홍식이네 할머니의 오른손이 가로막았다.
“그냥 주는 거 아니고 낭중에 잘 돼서 갚으러 오라구 주는 것이니께. 알았쥬?”
“고맙습니다, 할머님. 꼭 그리하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버스를 타고 목적지로 나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평생 놀고 먹어도 충분할 만큼의 돈을 벌어 둔 미래의 자신이 더 이상 아니었다. 시우는 홍식이네 할머니 돈을 두 손으로 깊이 고개 숙이며 받았다.
시우는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진호댁네 집 대문을 열고 나가 따라 나온 두 할머니를 향해 허리 굽혀 인사했다. 어여 가라는 듯, 할머니들은 연신 두 손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렸다. 진호댁은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너무 늦지 않게 청학리에 꼭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