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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종호 Oct 12. 2024

시간 시장(Time Market)-5

인연

버스는 하루 세 번 완행 열차가 다니는 전산역 앞 정류장 종점에서 멈추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 한 점이 불어와 먼지를 훅 일으켰다. 전산면은 밭과 산이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1971년의 한국 어디에나 산과 밭이 없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전산면에는 논이 없었다. 대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양의 채소가 수확되는 곳이었다. 

역 앞 비포장 도로 건너편으로 초록색 채소들로 뒤덮인 드넓은 밭들과 저수지가 보였다. 그 밭들의 중앙에 웅장한 크기의 창고 건물 하나가 서 있었다. 

처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전산면의 대지주로 전산면 내 밭은 대부분 그녀의 소유였고 따라서 그곳에서 재배되는 채소 역시 그녀의 것이었다. 많은 전산면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의 그늘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셈이었다. 

먼지를 피해 잠시 도로에서 떨어져 있던 시우는 먼지가 가시자 외벽에 정농산업 주식회사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는 건물로 길게 이어진 뚝방 길을 걸어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사명 아래에 씌어진 ‘사훈: 정직하게 농사짓고 정직하게 팔자’라는 글귀도 눈에 들어왔다. 창고 앞 너른 공터는 채소를 싣는 인부들과 채소를 싣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트럭들로 분주했다.


창고 현관을 밀고 들어가자 높은 천장까지 빼곡하게 쌓여 있는 각종 채소들과 채소들을 트럭에 분주히 싣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중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는 인부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사무실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부가 양복을 입은 시우를 위 아래로 잠시 훑어 보더니 대답했다.

“쭉 걸어서 저짝 끝까지 가믄 문이 있을 거구요. 그 안짝이 사무실이유.”

“감사합니다.”

시우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웬만한 체육관 넓이의 큰 창고를 가로질러 맞은 편 사무실을 향해 나아갔다. 


“어떻게 오셨대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직원이 물었다. 아마도 상고를 갓 졸업하고 경리 겸 잡무를 병행하고 있을 터였다. 

“최지원 사장님 좀 뵈러 왔습니다.”

“사장님유? 무슨 일이신 데유?”

“거래 건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유.”

여직원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안쪽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말했다. 

“저짝으로 들어가세유.”


“어서 오세요, 최지원입니다.”

“오시웁니다. 약속 없이 찾아왔는데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시우가 45도 각도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거래 차 찾아오시는 분들을 환영하지 않으면 사업하지 말아야지요. 자,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40대 초반의 지원은 호인이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에 조부가 상업으로 부를 일군 뒤 사들인 전산면의 땅과 전산면 사람들을 사랑했던 인물이었다. 도쿄에서 유학하는 동안 그녀의 가슴 안에 피어났던 애국심과 인간애는 어려운 조국의 현실 속에서 만개하고 있었다. 

“최 사장님. 초면에 실례가 아니라면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면서 대화해도 괜찮을까요?”

시우는 지원이 애연가라는 사실을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책상 위의 재떨이와 그 안의 꽁초들, 그리고 방안에 배어 있는 은근한 담배 냄새가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아, 실례랄 게 뭐 있겠습니까? 마침 한 대 피우고 싶었는데 잘 되었네요. 자, 나가시죠.”

지원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 뒤쪽으로 열려 있는 문으로 따라 나오라고 시우를 이끌었다. 8월 하순에 접어든 날에 더위가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었다. 

“거래처가 남아도는 상황일 텐데 시간 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오 사장님. 제가 비록 시골에서 밭농사 져서 먹고 살아왔지만 그래서 알아요. 채소와 사람이 닮았거든요. 나하고 인연인 사람인가 아닌가를 본능적으로 알아채죠. 채소 농사도 단순해 보이지만 고려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땅도 사람도 혹사시키면 안 돼요. 욕심을 부려서도 안 돼죠. 그러면서도 예측을 정말 잘 해야 해요. 애써 농사 지어서 헐값으로 팔리는 상황을 맞으면 직원들도 회사도 힘들 거든요. 그런 것을 잘 읽어야 하지요. 날씨처럼 한치 앞을 보기 힘든 경우가 많아요.”

“그 한치 앞, 제가 보시게 해드리겠습니다.”

지원의 말에서 시우는 비수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을 발견하고 직진했다. 지원이 시우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들어봅시다, 사연.”


시우는 담배를 깊게 빨고 연기를 길게 내보낸 후 지원을 부드럽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장님께 조만간 육군본부에서 찾아올 것입니다. 전국의 훈련소마다 부식용 채소를 공급하는 장기 계약을 맺자고 할 거예요. 그 계약, 맺으시면 안 됩니다. 군인들을 믿으시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연 1회 결제 조건을 내밀 것입니다. 하지만 놈들은 결제를 하지 않을 거예요. 받을 금액이 누적되어 갈수록 사장님의 어려움이 가중됩니다. 물량을 다른 거래처에 공급했을 때 얻을 수입을 다 놓치시게 될 것이니까요. 놈들이 접근해 오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장님을 망치려는 것이지요. 사장님 조부 고 최선종 옹께서는 겉으로는 친일을 하셨지만 독립 자금을 대신 분이지요. 놈들은 그 사실을 부친으로부터 들어서 잘 알고 계시는 사장님의 높은 콧대를 꺾고 싶어 해요. 농사꾼에 장사치, 그리고 여자 주제에 자신들보다 도덕성 면에서 우위에 서는 게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장님 회사를 타겟으로 삼고 빼앗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엄청나게 좋은 조건에 더해 애국심을 자극해서 사장님의 물량을 받아갈 거예요. 그리고선 5년 간 한 푼도 결제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장님께서 소송을 거시길 기다리는 것이지요. 놈들은 대법원까지 끌고 갈 겁니다. 1심에서 져 주고 2심에서 뒤집어요. 그리고 최종심에서 판사들은 정부 편을 듭니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독재자에게 부역하는 놈들인데. 그 10년간 사장님은 가지고 계신 부동산을 모조리 파시게 돼요.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지요. 부모님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협박에 이르러서 사장님께서는 무일푼으로 전산면을 떠나시게 됩니다.”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죠?”

“오늘 저녁 라디오를 켜 보십시오. 불순분자들이 서울 시내에 버스를 몰고 진입했다는 뉴스가 나올 것입니다. 그들은 실상 실미도에서 북파공작원으로 양성되었다가 배신 당해 탈출한 군인들입니다.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 멈춰 선 버스 안에서 그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할 것입니다. 4명이 생존합니다. 저는 역전 앞 삼거리 다방에서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뉴스 듣고 오시면 7시쯤 되겠네요. 나머지 대화는 그때 이어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이따 뵙겠습니다.”


지원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화병으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그녀의 은혜를 입었던 몇몇 사람들이 모여 그녀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힘겨운 투혼은 202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국가의 사과와 보상을 이끌어냈다. 사학 교수였던 그들의 자식들 중 하나가 쓴 책에서 시우는 지원이 남긴 한 맺힌 유언을 읽었다. 

6시 55분에 지원은 다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한 거죠? 당신 중정 요원이라도 되나요?”

“일단 시원한 냉커피 한 잔 드시고 나가시지요. 사장님 댁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들으셔야 할 얘기입니다. 길거든요.”


걸음을 멈춘 상기된 얼굴의 지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시우도 옆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겁니까?”

“오늘 저녁 뉴스 들으셨잖습니까?”

“당신이 중정 요원이라면 준비된 쇼일 수도 있겠지요. 다음 주에 온다는 육본 사람들도 중정과의 불편한 관계를 감안하면 막아야 할 나름의 이유도 있겠구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장님. 사장님 본능이 이미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와의 인연이 악연이 아니라는 것을. 정반대로 일생일대의 선연이라는 것을.”

시우가 지원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섰다. 지원도 시우의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았다.

“솔직히 그래요. 당신은 왜 내게 온 거죠?”

“사장님 같은 분께서 악마들에게 긴 시간 동안 시달리시며 쓸쓸하게 돌아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장님이 갖고 계신 밑천과 미래에 대한 저의 지식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하시지요.”

“이것 참 도무지…….”

“댁에서 술 한 잔 주시겠습니까?”

지원을 바라보는 시우의 눈동자가 노을을 받아 붉게 이글거렸다. 지원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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