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5월 24일 24화

23화 : 12년 만의 약속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by 낭만피셔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오후, 지현은 자신의 집 작업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지만 일은 거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번역하던 문서가 그대로 띄워져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거나 창밖을 향했다. 아침에 확인한 윤섭의 메시지 이후, 온종일 안절부절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심장은 저 멋대로 뛰어댔고, 집중력은 바닥이었다.


결국 그녀는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 장소로 나가기 전, 도저히 혼자서는 이 불안감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응원이라도 받기 위해 그녀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익숙한 번호, 경진의 이름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경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벌써 만났어?"


"아니… 이제 곧…" 지현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기어들어갔다.


"야, 나 어떡하지? 진짜 떨려 죽겠어. 그냥 가지 말까? 갑자기 취소할까?"


수화기 너머로 경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꼴값 떨고 있네. 네가 답장 보냈고, 걔도 좋다고 했을 거 아니야. 이제 와서 뭘 어째? 배 째!”


“아니, 그래도…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12년 만인데…”


지현은 거의 울상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이긴. 그냥 잘 지냈냐, 뭐하고 사냐, 그런 얘기부터 하는 거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가서 네 할 말이나 제대로 하고 와. 또 그때처럼 얼어있지 말고.”


경진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끝에는 진심 어린 응원이 담겨 있었다.


“…알았어. 아무튼 응원이나 해줘.”


“당연하지! 가서 너무 예쁜 척은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잘 하고 와라, 내 친구!”


전화를 끊고 나서도 지현의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른 입술을 몇 번이나 축였다.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가다듬었다. 심호흡을 크게 했다. 괜찮아, 김지현. 그냥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고 생각해. 할 수 있어.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녀는 현관문을 나섰다.




약속 장소인 카페는 시내 중심가의 조금은 낯설고 조용한 곳이었다. <카페 바바블랙쉽>이 아닌 이곳을 정한 그의 마음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저절로 숨을 멈췄다.


창가 구석 자리에 그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신윤섭.


12년 만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제대로 마주하는 얼굴. 창밖을 보고 있었지만,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며칠 전 <카페 바바블랙쉽>에서 마주쳤을 때의 얼어붙을 듯한 긴장감과는 또 달랐다. 그때는 예기치 못한 우연이었지만, 지금은 명백한 약속이었다. 서로를 만나기 위해 온 자리.


윤섭이 먼저 자리에서 살짝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색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지현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테이블 앞에 서자, 연습했던 말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윤섭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고, 12년 전보다 한 톤 낮아진 것 같기도 했다.


“…오랜만이다, 지현아.”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이름이 담겨 불리는 순간, 12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이 현실처럼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응. 오랜만이네, 윤섭아.”


그녀도 겨우 대답했다. 어색하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반말 인사가 조용한 카페 공기 중에 흩어졌다.


“앉아.” 윤섭이 맞은편 의자를 손짓으로 권했다.


지현은 가방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보고 앉으니 숨 막히는 어색함이 더 크게 밀려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테이블 위의 물 잔이나 메뉴판만 괜히 내려다보았다.


‘벌써… 12년인가.’ 지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렀고, 그와 그녀는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이 숨 막히는 어색함 속에서도, 여전히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는 마음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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