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약 시간이 반복된다고 해도
그날 저녁, 영화 동아리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다른 부원들은 모두 돌아가고, 윤섭과 지현 단둘만이 남아 낡은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서는 조금 전 함께 본 오래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똑같은 하루가 지독하게 반복되는 남자, 그리고 그 속에서 진짜 사랑을 깨닫고 마침내 내일을 맞이하는 이야기.
영화가 남긴 깊은 여운 때문인지, 아니면 어두운 동아리 방 안에 단둘이 남겨졌다는 사실 때문인지, 둘 사이에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조용하고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노트북 화면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윤섭이었다. 노트북을 덮자 동아리 방은 거의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이제… 슬슬 갈까?"
그의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지현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동아리 방을 간단히 정리하고 밖으로 나섰다. 밖은 이미 완전히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밤공기는 상쾌했고, 조금 전 영화 속 이야기처럼, 두 사람은 시간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 대해 생각하며 나란히 밤거리를 걸었다. 가로등 불빛만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지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영화의 여운 때문인지 살짝 잠겨 있었다.
“만약에 진짜 저렇게 시간이 반복된다면 어떨까?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사는 거.”
윤섭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녀 역시 깊이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
“처음엔… 끔찍하겠지. 희망 없는 지옥 같을지도 몰라. 필 코너스처럼.”
“맞아.”
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결국 그는 변했잖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면서.”
“응. 매일 똑같은 하루 속에서도, 결국 자신을 바꾸고 사랑을 얻어내는 거. 어쩌면 그게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윤섭은 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걸음을 멈추고 지현을 향해 돌아섰다. 밤공기 속, 그의 눈빛이 유난히 깊고 진지했다.
그는 지현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그녀의 놀란 눈과 마주하며, 그는 조금 전 영화에서 느꼈던 감동과 그녀를 향한 자신의 벅찬 마음을 담아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확신은 단단했다.
“나는 만약 시간이 반복된다고 해도,”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매일 너만 찾아갈 거야. 지현아.”
지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갑작스럽고도 강렬한 고백에 숨을 삼켰다. 그의 손길이 닿은 어깨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든, 어떤 모습으로 반복되든, 내 마지막은 항상 너였으면 좋겠어. 너랑 함께하는 내일이었으면 좋겠어.”
그의 진심이 밤공기를 타고 그녀의 마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 속에는 오롯이 자신만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윤섭의 손을 마주 잡았다. 차가운 밤공기와 달리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은 뜨거웠다.
어떤 화려한 약속의 말보다 더 확실한 약속이었다. 영원히 함께하자고. 지금 이 마음 변치 말자고.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오직 둘만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의 스무 살 언저리, 가장 빛나고 서로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찼던 순간. 밤하늘 아래, 가로등 불빛을 받은 두 개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하나처럼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