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5월 24일 28화

27화 : 기다림의 계절

첫 만남과 설렘의 시간 끝에 찾아온

by 낭만피셔

시간은 12년 전으로, 아니 그보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갔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스물한 살의 윤섭은 머리를 짧게 깎고 어색한 군복 차림으로 훈련소 입소장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눈가가 붉어진 지현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짧지만 강렬했던 첫 만남과 설렘의 시간 끝에 찾아온 첫 번째 긴 이별이었다.


“잘 다녀와. 편지 자주 할게.”

“응. 기다릴 거지?”

“당연하지.”

“나도 편지할게. 전화도 자주 하고.”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멋진 대사는 없었다. 다만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한 채, “잘 지내.”, “몸 건강히.”, “기다릴게.” 같은 평범하지만 절실한 약속들을 눈물과 함께 몇 번이고 되풀이했을 뿐이다. 윤섭이 탄 버스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 갈 때까지, 지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두 사람의 첫 번째 긴 기다림의 계절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윤섭이 없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게, 그리고 허전하게 흘러갔다. 지현은 강의실과 도서관, 가끔의 아르바이트 장소를 오가며 평범한 대학 생활을 이어갔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비어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밤, 책상 앞에 앉아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하루 동안 있었던 사소한 일들, 새로 본 영화 이야기, 친구들의 소식, 그리고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리움을 꾹꾹 눌러 담았다. 때로는 그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배경음악을 들으며, 그의 사진첩 속 짧은 머리의 그를 보며 혼자 울고 웃었다. 우표를 붙여 보낸 편지가 그에게 잘 도착했을까, 그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몇 달에 한 번, 면회를 가는 날은 지현에게 가장 특별한 날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설레는 마음으로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짧은 만남 동안 나누는 평범한 대화, 마주 잡은 손의 온기, 그의 어깨에 잠시 기댔을 때 느껴지던 단단함.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다음 몇 달을 버틸 힘이 되었다.


철책 안에서의 시간은 윤섭에게도 다른 무게로 흘렀다. 고된 훈련과 낯선 환경 속에서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어쩌면, 관물대 깊숙이 넣어둔 그녀의 빛바랜 사진 한 장과 밤마다 몰래 읽고 또 읽었던 그녀의 서툰 글씨체 편지들이었을 것이다. ‘보고 싶다’는 말 대신 ‘오늘 본 영화는…’으로 시작하는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그는 제대 후 그녀와 함께 볼 영화 리스트를 마음속으로 만들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길고 길었던 기다림의 끝, 제대의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지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부대 앞을 서성였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위병소 문이 열리고, 군복 대신 사복을 입은 남자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왔다. 지현은 숨을 죽이고 그 속에서 윤섭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군 생활 동안 조금 마르고 얼굴이 까맣게 탔지만 여전히 익숙한, 그토록 그리워했던 윤섭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인파 속에서 지현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갔다.


와락!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2년이라는 기다림의 시간, 수많은 편지와 짧은 통화로는 다 채울 수 없었던 그리움이 뜨거운 눈물과 함께 쏟아졌다. 품에 안긴 그의 단단함과 온기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현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 아이처럼 울었다. 윤섭 역시 그녀의 등을 말없이, 하지만 누구보다 굳세게 토닥였다. 그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고, 그들은 다시 함께였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벅차올랐던, 그래서 서로의 사랑이 더욱 단단해졌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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