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5월 24일 27화

26화 : 12년 후의 우리

과거의 달콤하고 벅찼던 기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득하게 멀어졌다

by 낭만피셔

과거의 달콤하고 벅찼던 기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아득하게 멀어졌다. 지현은 다시 2025년, 12년 만에 마주 앉은 윤섭 앞의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그 시절의 우리는,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그때, 카페 직원이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메뉴판이라는 방패 뒤에 잠시 숨어 어색함을 달랠 시간이 주어졌으니까. 지현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윤섭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12년 전 그녀가 마셨던 따뜻한 카페라떼와 그가 마셨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취향은 조금 변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다른 커피를 시키는구나, 지현은 문득 생각했다.


음료가 나오고, 빨대로 얼음을 휘젓는 소리가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희석시켜 주었다. 윤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안정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 방금 전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불어 통번역 일은… 계속 하는 거야?”


지현은 살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의 근황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어? 어… 어떻게 알았어?”


윤섭은 약간 머뭇거리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아… 그냥. 네 인스타그램 보니까… 영화 번역 얘기도 있고 그래서.”


그가 자신의 SNS를 봤다는 사실. 지현은 또 한 번 놀랐다. 동시에 그가 자신을 궁금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애써 눌러왔던 심장이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 응. 그냥 꾸준히 하고 있어. 영화 쪽 일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이니까.”


그녀는 자신의 커피 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너는… 제작자는 언제부터 한 거야? 완전 다른 길을 갈 줄 알았는데. 영화감독 한다고 했었잖아.”


윤섭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영화가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더라고. 일이 되니까.”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지현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스무 살,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반짝이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지금 그의 눈에는 그때와는 다른, 현실의 무게와 오랜 피로감이 어려 있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꿈을 좇아 떠났던 프랑스에서의 시간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으니까.


“지현이 너는… 프랑스에는 얼마나 있었어?”


그가 화제를 돌리듯 물었다.


“음… 한 5년 정도?”


“오래 있었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생각보다 길어졌지.”


지현은 짧게 대답했다. 그곳에서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겪었던 일들, 그리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떠올리자 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두 사람은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커피를 마셨다. 12년의 시간은 많은 것을 남겼고, 또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앳된 대학생은 각자의 분야에서 밥벌이를 하는 어른이 되었고, 순수했던 열정은 현실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고, 여전히 어딘가 서툴고, 또 서로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다시 찾아온 침묵을 이번에는 지현이 먼저 깼다. 그의 DM 내용을 떠올린 참이었다.


“…참, 아까 DM에서 ‘멋진 하루’ 얘기했었지.”


그녀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요즘도 가끔 생각나, 그 영화.”

윤섭은 그녀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 몰랐다는 듯,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 어. 나도. 얼마 전에 회사 후배가 그 얘기하는 바람에… 갑자기 네 생각이 확 나더라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지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네가 추천해줘서 처음 봤을 때… 진짜 좋았거든. 왜 좋았는지는 잘 설명 못 하겠는데, 그냥… 되게 현실적인데 이상하게 계속 마음에 남는 느낌?”


윤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도 그랬어. 특별할 거 없는 하루인데도,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면 지금 자신들의 모습 같기도 해서.


“그러게. 지금 다시 보면 또 느낌이 다르려나.”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윤섭은 지현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우리도 변했으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씁쓸함과 동시에 어떤 기대감이 섞여 있는 듯했다.


지현은 맞은편에 앉은 윤섭을 다시 보았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오늘따라 더 깊어 보였다. 어쩌면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한 무게의 시간을, 비슷한 외로움 속에서 통과해 온 건 아닐까.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커피 잔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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