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 백지 마주하기
디자인은 고민할 수 있는 영역이 무척이나 넓다. 단순히 이미지를 베리에이션 하거나 확정된 안이 있는 디자인이 아니라 직접 하나하나 제작해 나가야 하는, 창작의 요소가 다분히 들어가 있는 작업의 경우 고민의 수가 다양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고되고 피곤하다.
적당한 규모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들어와 디자이너로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작업들을 접해 보았다. 오퍼레이터적인 측면이 강한 반복적인 작업부터 제품 로고, 패키지, 판촉물, 매장까지 아우르는 전체적인 디자인 그리고 여러 편집물, 프로모션, 제안서 작업, 인쇄 감리 등등. 업무는 다양하고 그에 들어가는 힘은 확실히 다르다. 어떠한 것이 더 편하고 좋다는 없지만 경중과 피로도는 확실히 달랐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정신적인 피로도가 높은 것은 키비쥬얼 작업이다.
적당히 괜찮은 이미지들을 기반으로 좋은 작업을 만드는 것은 기한이 빠듯하더라도 꽤 할만하다.(물론 쉽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미있고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괜찮은 결과물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기본 소스가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재를 직접 하나하나 제작해 나가는 작업은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결과물이 눈에 띄지도 않고 맞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스타일을 맞춰가야 한다. 힘들게 쌓아도 수포로 돌아가면 다시 쓸 수가 없다. 때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키비쥬얼이라고 하면 어떤 프로젝트를 펼치는 데 있어서 핵심 이미지를 뜻한다. 키비쥬얼이 정해지면 그것을 기반으로 2차 3차 제작물을 전개시키기 때문에 그 이미지 하나로 좋을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적용하더라도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진행해야 한다. 또한 인쇄 혹은 미디어 등 다양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해상도 또한 높아야 하고 데이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신경 써서 제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스 제작과 효과도 스타일에 맞게 퀄리티를 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프로젝트의 키비쥬얼을 제작하는 일은 멀고도 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컨셉이 주어졌다 해도 백지 위에 시작하는 일이기에 많은 시간을 명확하게 조율하는 데에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빈티지 레트로라고 하더라도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이미지로 구체화시킬 때 선이나 컬러를 어떤 식으로 조합하고 소재를 선정할지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어야 한다. 자칫 아무 생각 없이 진행하다가는 엉뚱하거나 맞지 않거나 심미적으로 떨어져 버릴 수 있다. 그 험난함을 대부분이 대략적으로 유추가 되다 보니 창작하는 일의 대단함을 모두가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디자이너이지만 그러한 회전이 빠른 창작자들을 무척이나 존경한다.
매번 작업에 돌입할 때마다 백지의 압박을 느낀다. 중간단계로 들어가면 열심히 컨텐츠를 쌓아가면 되지만 아무것도 없는 하얀 도큐먼트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앞으로 펼쳐질 난항에 뼈가 시려온다. 하지만 온전히 내 힘으로 비쥬얼을 이끌어간다는 것 또한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매번 그러한 프레쉬함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힘든 것보다 의욕과 동기부여에 가치를 두려고 노력한다. 실제로도 그러한 작업들은 분명히 성취감과 만족감을 준다 비록 그 과정과 시작이 버거울지라도. 그리고 그러한 사이클 자체가 디자이너가 일하는 환경의 생리가 아닐까. 그것을 부정하고 디자이너를 지속시켜나가는 일은 지치는 일일 것이다. 하고자 하는 일에 계속 애정을 품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