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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09. 2023

가위에 눌릴 때 즐기는 방법

여덟 번째 불면일지

잠과 늘 사투를 벌이기에 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하여 1) 자각몽, 2) 악몽, 그리고 마지막 주제로 3) 가위눌림에 대해 쓸 참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계획을 세워뒀더니만 하필, 신기하게도 바로 그 다음날 가위에 눌려버렸다. 사실 30대가 지나며 가위에는 자주 눌리지 않는데(마지막 가위에 눌린 지 6개월도 더 지났다) 타이밍이 얄궂었다.


그 어떤 악몽보다 두려운게 가위눌림이다. 정신은 깼는데, 몸은 아직 깨어나지 못 한 그 상태에서의 공포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자세는 잠에 들기 전 침대에 누운 그대로인 채 옴짝달싹 움직일 수가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하나 둘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뜬눈으로 이를 마주해야 한다.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 2006>


환영의 종류는 다양하다. 천장에 붙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귀신은 어릴 적에 졸업했다. 클수록 창의력이 가미돼 귀신은 점점 신선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랄해진 형태의 환영이 내 방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경험치가 쌓이며 환영은 오히려 현실과 가깝게 진화하기도 했는데, 제일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내 침대 옆에 반쯤 앉아 피를 철철 흘리며 노려보고 있던, 다리가 잘린 30대의 군인 남성이었다. 십 년은 더 지났을 텐데도 그 원망스러운 눈이 또렷하다.


가위눌리는 현상은 불면증과 우울증이 발현되기 훨씬 전인 중학교 때부터 자주 나타났다. 시험기간에는 일주일에 2회는 기본, 많게는 3-4회까지 가위에 눌렸다. 너무나 괴롭고 무서워서, 그리고 하도 지겨워서 깨어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본 기억이 난다. 그 결과 어설프지만 나름의 노하우를 가지게 됐다.


일단 1) 온몸에 힘을 빼는 법, 그리고 2) 온몸에 힘을 주는 법 두 개의 방법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쉬워보이지만 성공확률이 낮다. 무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을 완전히 이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은 대개의 경우 성공해 내지만, 또 그만큼 힘이 많이 든다. 말 그대로 온몸에 찡그리듯 힘을 꽉! 줘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위에 눌려 두려운 와중에도, 이 방법을 이제는 아는데도,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잠시 쿨타임을 가질 때도 있다.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 2006>


"한 번 가위에 눌리면 계속 눌린다"고들 한다. 그러니 가위에서 깨어나는 데 성공한 뒤 그대로 다시 잠에 들면 안 된다. 몸과 정신이 방금 전과 같은 동일한 수면모드로 각각 돌입해 백 프로 다시 가위에 눌린다. 이는 불문율이다. 고로 사이에 깨어있는 시간을 30분 이상은 가져야 안전하다.


하지만 보통 심신이 매우 피곤할 때 가위에 눌리므로, 중간에 깬 이 시간을 버티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래서 그럴 때의 나는 보통 무언갈 먹는다. 부엌으로 이동해 정신없이 먹다 보면 시간은 지나있다. 그리고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정신과 몸도 아까와는 다른 모드로 바뀌어져 있다. 그제야 어느정도 싱크가 맞는 느낌이다. 그 상태로 누워서 자면 웬만해선 가위에 눌리지 않는다. 물론 식도염과 위염, 심지어 숙면에도 좋지 않은 방법인걸 안다. 하지만 야밤 중 피로가 짓누를 때 한 번 눌린 가위로 다시 회귀하지 않는 더 손쉬운 방법을 나는 찾지 못 했다.




가위 황금기였던 중학교 시절, 나는 가위로부터 힘을 덜 들이고 깰 수 있는 용이한 방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곤 했다. 그러면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그 당시 ‘가위눌리는 것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는 카페까지 있더라.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나를 포함한 카페 멤버들의 처절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일주일에 반 이상을 가위에 눌린다면 이를 피하기보단 더불어 살아가려 노력하는 편이 영리하다. 영리한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였다. 카페엔 최선에 실패해도 ‘최선의 차선’을 찾으려는 의지들이 기죽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핵심은 간단했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건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눈앞에 나타나는 환영을 컨트롤하자는 것이었다.


가위를 '즐기는' 방법:

일단 가위에 눌렸단 사실을 인지하면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갖고 온몸에 긴장을 푼다. ‘무서운 게 나타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무서운 게 눈앞에 나타나므로 재빠르게 다른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타이밍이 중요한데, 환영이 보일 듯 말 듯하는 그 찰나에 내가 보고 싶은 무언가를 강하게 떠올린다. 심지어 고도의 집중력으로 내 몸을 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유체 이탈을 경험할 수도 있다. 영화에서처럼 스윽 하고 영혼이 분리되는 모양새는 아니고, 어느 순간 몸에서 훙덩 빠져나와 있다. 그러면 사실 이 상태는 가위눌림에서 자각몽에 가까워진다. (오히려 좋다. 이제는 창문을 찾아 하늘을 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와 몸을 분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여러 차례 연습 끝에 환영을 골라 띄워내는 일에는 어느 정도 숙달이 됐다. 귀신이나 끔찍한 형상이 아닌, 내가 보고 싶은 환영을 골라 볼 수 있다는 건 진귀한 능력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통 내가 애정하고, 또 보고싶은 무언가보다는 뜬금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상상했을 때가 타율이 높았다. 야한 생각을 하면 그것도 종종 이루어졌다. 원하는 상대는 역시나 불가능했지만.




제일 최근의 가위는 여태 겪었던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일단 다시 초보 가위러로 돌아가 정신없이 당황했고, 가위에 눌렸단 생각이 들자마자 자동적으로 무언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에 압도됐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 시사회에서 직접 영접했던 강동원을 미친 듯이 떠올리기로 했다. (맞다, 틈새자랑)


강동원, 강동원, 강동원...




무려 악령도 퇴마했던 <검은 사제들>의 강동원이 아닌가. 나는 필사적으로 강동원의 이름 석자, 실물의 생생한 느낌, 그리고 반평생 봐온 무수한 사진들을 떠올렸다. 부디 강동원이 다리 없는 군인 대신 내 침대 옆에 서 있길 바랐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웬걸, 역시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뜬금없는 무언가가 나타났다(어쩌면 강동원은 내가 변태짓을 할까 봐 두려웠던 걸까). 정체는 바로 엄마였다. 엄마가 무언가 절실히 외치고 있었다.


환청이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 시간엔 자고 있어야 할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이었다. 군인도, 강동원도 아닌 엄마라니. 친숙한 버전의 환영이어서 무섭진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이 가위로부터 나를 구해주러 온 줄 착각해 반갑기까지했다. 나는 무아지경으로 엄마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엄마는 문가에 그대로 선 채 이상한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엄마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은 나는 결국 원래 나의 고전적인 방법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온몸에 꽉! 하고 자극을 주는 것. 그렇게 힘을 꾸역꾸역 들여 가위에서 깨어났던 게 며칠 전 일이다.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당연히 방에 엄마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엄마에게 들었던 꿀팁이 하나 있었다. 가위에 눌리면 속으로 계속 주기도문을 되뇌는 것이다. 엄마에겐 꽤 용한 방법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안 통하는 걸 보면 독실한 신자 전용 방법인 듯 하니 기독교인들은 참고하면 좋겠다.


또 작년에는 어디선가 혀를 내밀면 가위에서 쉽게 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도해 봤었다. 놀랍게도 이 방법은 내게 잘 맞았는지 한방에 가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위눌리는 빈도 수가 점점 줄다 보니 막상 닥쳤을 때 이 방법을 쉬이 떠올리지 못한다. 이번 가위에서도 엄마에게 메롱을 할 생각도 못한 채 애를 먹었으니까. 다음에는 방심하지 말고, 혀 내미는 방법을 잊지 말고, 만발의 준비를 해놔야지.  행여 혀를 내미는 방법으로도 가위에서 깨지 못한다면 다음에는 부디, 초고도로 집중해서


강동원, 강동원, 강동원.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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