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인장 Aug 23. 2023

잠 못 ‘잔’ 사람을 위한 최선의 위로

어제는 약이 잘 드는 날이었다. 세 시간 정도 자고 중간에 한 번 깨 삼십 분을 뒤척인 뒤, 다시 두 시간 조금 넘게 잤다. 도합 대여섯 시간은 채웠으리란 빠른 계산 후 아침이 퍽 기꺼웠다. 그렇게 생산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전 날 한 시간 간격으로 깬 엊그제보다 빠른 속도로 피로가 밀려왔다.


이렇듯 수면장애가 10년 넘게 이어져도 숙면의 메커니즘은 감조차 잡을 수 없다. 그렇게 오늘도 한껏 쳐진 몸으로 몽롱하면서도 예민하게 하루를 버텼다. 이런 날에는 틈틈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런 날도 있지 뭐, '라고. 애써 대수롭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럴 땐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나의 컨디션을 설명하는 과정은 지난하고, 억지웃음을 띤 채 분위기를 맞추고 있기엔 에너지 소모가 몹시 크다. 사실 "어제 잠을 잘 못 잤다."라고 가볍게 털어놓으면 대부분 이해해 줄텐데도 굳이 그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아무래도 돌아오는 반응이 불편해서일 테다.


현대사회에서 "어젯밤 잠을 푹 잤어"라는 말은 드물게 들린다. 오밤중 숏폼 콘텐츠의 유혹을 이기지 못 한 현대인의 안부는 "어제도 잠을 잘 못잤어." 로 대체된다. 그렇다면 잔뜩 피곤한 얼굴로 수면부족을 토로하는 이를 위한 최선의 위로는 뭘까. ("헉 그러게, 진짜 피곤해보여" 는 금지. 근심에서 나온 말이 잠을 못 자 한껏 예민해진 이에겐 '낯빛이 오늘따라 구리다'는 뜻으로 곡해될 수 있다.)


"어떡해. 피곤하겠어." 정도면 되지 않을까?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준에선 이토록 간단하다. "얼마나 못 잤는데?", "무슨 일 있었어?", "진짜 피곤하겠다", "오늘은 일찍 푹 자면 좋겠네"  등등 공감을 내비치는 어휘들은 넘쳐난다. 행동으로 보이고 싶다면 커피 한 잔 사다 주면 끝이다.




하지만 오늘만이 아닌, 매일매일이 피곤한 사람에겐 어떨까?


내게

1. [어제 잠을 못 잤어 / 요즘 잠을 잘 못 자]

2. [불면증이 있어 / 잠을 잘 자기 위해 약을 먹어 / 정신과를 다녀. 그런지는 꽤 됐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일 때의 나는 수면부족인 상태를 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좀비 몰골을 해명하기 위해 전날 밤을 설명하는 일은 수월했고, 상대방의 어떤 반응에도 감사함 외에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근데 난 좀 심한 편이라.. 이런 지도 십 년이 넘었어." 라는 말을 뱉게 된 후자의 나는 상대의 언행에 쉽게 삐딱선을 탄다.


몇몇 이들은 말한다. 운동을 빡세게 하면 푹 잘 수밖에 없다며, 스마트폰을 멀리 하라며. 나를 위한 조언일 테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불면증을 겪었다는 사람에게 이런 류의 제안은 결국 '해결법은 이리도 간단한데 네가 게으르고 의지가 부족해 약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는 말로 들리기 쉽다. 순식간에 한심한 사람이 된 기분에 사로잡힌다. 예전 같으면 감사했을 말에 속 좁게 분개한다.


회사를 다니지 않고 있는 내게 '불규칙적인 생활'을 문제 삼는 이도 있다. 그러면 나는 백수 시절 겨우 단약에 성공했다가, 입사하자마자 다시금 정신과를 찾아야 했던 과거를 설명하기도 전부터 진이 빠진다. 이른바 '패션불면증'에라도 걸린 줄 아는 걸까? “그럼요. 알죠. 해봤죠, 전부.” 이제는 정색하는 대신 쓴웃음을 짓는다.


요즈음의 불면증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흔한 질병, 아니 증상이니만큼 한없이 가볍게 치부되는 것 같다. 그러니 나 역시 구태여 컨디션 난조의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아진다. 가까운 사람 외엔 불면증을 애써 숨기거나, 혹은 최대한 가볍게 말하고 넘어간다. 그래야 내가 덜 상처 받으니까.


그러니까 다음 글은 <잠 못 '잔' 사람을 위한 최선의 위로>가 아닌, <잠 못 '자는' 사람을 위한 최선의 위로>가 주제다. 생각해 보면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도 누군가의 단 한 마디, 그리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도 단 한마디에 불과했다.


어느덧 잘 시간이 되어 또다시 약을 꺼냈다. 오늘따라 개수가 많게 느껴져 배가 부를 지경이다. 지겹고 지치지만, 밤이라 내 기분이 더 울적한 거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자기애보다 자기 연민이 훨씬 꼴사납고 무용하다는걸 잘 아니까. 다시금, 뭐든 '대수롭지 않게'를 붙이는 태도. 대수롭지 않게 오늘보다 나을 내일을 기대해 본다.

이전 07화 가위에 눌릴 때 즐기는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