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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05. 2023

잠 못 '자는' 사람을 위한 최선의 위로 (2)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을 별거 아닌 양 치부할 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가.


디뎌본 적 없는 고통을 준비자세 없이 듣게 됐을 때를 기억한다. 위로는 커녕 어떤 표정과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결국 바보같은 조금의 어버버 끝에 말을 찾지 못 하고 꼭 안아주는게 나의 최선이었다. 또 어쩔땐 보편적이고, 그렇기에 기계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위로를 하게 된다. 그렇게 무언가 빈 듯한 형편없는 위로를 건네고 돌아서 후회했던 날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픈 사람에게 조언 내지 위로를 할 때에는 평소라면 사용하지 않을 온갖 ‘세심 에너지’를 전부 끌어모은다. "얼마나 힘들었어.” 라며 고통에 공감과 연민을 표하면서도, 과하게 동정하지 않는 자세. “다 지나갈거야, 별거 아니야.” 상태를 파국화시키지 않으면서도, 그간 겪은 아픔을 대수롭지 않은 양 치부하지는 않는 자세.


이처럼 너무 딱하게 “아유 불쌍해” 하며 여기지도, 마냥 잘될거라며 “머가리꽃밭” 같이 무신경하게 답하지도 않기 위해 세심 에너지를 써야 한다. 병마다, 상대마다 다르게 적합한 단어, 뉘앙스, 말투, 표정을 찾아가는 과정. 사실 그렇다. 어느 날은 내 고통을 나보다 크게 느껴주는 이가 도움이 되고, 어느 날은 내 고통을 별일 아닌 걸로 만들어주는 이에게 감사하다. 그러니 늘 위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을 때가 있다. 어떤 말을 하든 부족하기에. 아무리 공감하려 해도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기에. 그간의 긴 아픔, 어떻게든 끌어모은 희망, 속절없이 무너지는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 애써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 같은 유구한 역사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적합한 위로를 찾는건 애초에 불가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크나큰 상실의 상황에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라는 형식적인 ‘정답’이 생겼을 테다.



그러나 진심은 전달되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고통에 위로의 말을 얹는 일은 어려워보일지 몰라도, 진심이 있다면 사실 모두가 고마웠다.


힘들었겠어.

억울하겠어.

속상하겠어.

어떻게 버텼어.


이런 류의 말을 들을 때 상대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러면 나는 그 진심을 한껏 부여잡는다. 주눅들어 땅으로 꺼져있는 내 자존감에 모래성처럼 쌓아 모은다. 스스로 쓰레기 같을 때 들었던 따뜻한 말 한마디를 우린 잊을 수가 없다.


진심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말들. (1)편에 사진으로 올렸던 김승일의 시가 그랬고(대상이 나는 아니더라도), 브런치 연재 초기에 친구 ‘색시’가 나를 위해 써줬던 글이 그랬다. 그리고 2년의 연애를 끝내던 날 “네가 잠 못 자는 사람 치고 착하다고 했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가.“ 라고 했던 전남자친구의 별거아닌 말까지. 모두가 고마웠고, 고맙고, 앞으로도 되새김질하며 평생 고맙겠지.



나는 가장 불안할 상황에서도 그 누구의 위로 없이 밤을 무사히 지나는 꿈을 꾼다. 하지만 정말 홀로 강해질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위로의 조각들이 늘 필요하다.


이런 순간을 살려고 나머지 순간들을 버텨 오는거지 싶은 그 날을 기다리며 타인의 진심이 담긴 모래들을 모으고, 또 모으고. 부족하다면 내가 스스로 말해주기도 하며, 더욱 더 단단하게 모래성을 다독이고. 그렇게 버티고 있다.





 친구 색시의 글. 나는 종교가 없음에도 "기도할게" 를 대체할만한, 그만큼 엄숙하고 진심어린 위로를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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