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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18. 2023

불면증 15년차가 본 영화 <잠>

“누가 들어왔어.”


늦은 밤, 자는 듯 싶던 남자가 돌연 말한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잠>에서 이선균은 몽유병을 앓고 있는 ‘현수’를 연기한다. 현수는 영화가 시작한 직후 “누가 들어왔다”며 비몽사몽한 채 뜻 모를 잠꼬대를 던지는데, 이는 추후 정유미가 분한 아내 ‘수진’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끔 물꼬를 트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누가 이선균에게 들어왔을까? 과연 정말 들어오긴 했을까? 들어왔다면 대체 누굴까?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며 몰입도를 높인다.


병의 원인을 초자연에서 찾는 수진의 모습은 미쳤다거나, 혹은 허무맹랑하기보다는 너무나 절실해 보여 가여웠다. 양의학으로는 질병에 차도가 없을 때 누구라도 부서진 짚이라도 잡고 싶을 테다. 나 역시 이 모든 악몽의 원흉이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 낫겠다 싶을 때가 있었다. 그 제 3자가 ‘사람‘이 아닌, 이승을 떠난 초현실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영화 속 수진이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에서 잠시 나를 봤다.


어쩌면 사람은 미칠 지경이 되어서야 미쳐 보였던 사람들이 사실 미치지 않았다고 깨닫는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미쳤긴 한 걸까?




나의 불면증이 이토록 심해진 데에는 트리거가 된 여러 계기들이 있었겠지만, 역시나 생각해 보면 나는 애초에 기질적으로 잠을 잘 못 잤다. 태어났을 때부터 예민해 매일 밤 잠을 못 자고 칭얼칭얼 울어댔던 아기가 나였다. 이는 무난히 통잠이 가능했던 언니의 신생아 시절 일화들과 비교되며 친척들에게 회자되곤 했다.


비교군이 1명일 때에는 그저 ‘조금 예민한 아이' 로 여길 수 있었지만 35명이 되자 '아주 아주 예민하고 극도로 잠을 잘 못 자는 편인 아이' 라고 결론이 섰다. 학창 시절 수련회라도 가면 언제나 내가 제일 늦게 잠들었으니까. 다들 어쩜 저리 바로 쌔근거리는지 의아해하며 두리번거렸던 밤들이 있었다. 그제서야 '언니가 아니라 내가 특이하구나.' '내가 잠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남들보다 오래 걸리는구나.' 알아갔다.



<잠>에서 이선균은 얼굴과 몸에 여러 센서를 붙이고 수면검사를 하는데, 나 역시 20대 시절 해봤던 검사였다. 수면다원검사를 통해 수면 패턴을 관찰했고, 그 외에 뇌 MRI 검사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원인을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병원에 퍼부은 돈이 무색하게도 제대로 된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나마 받은 진단으로는 사람의 24시간 주기를 전담하는 뇌의 어떤 부분(circadian rhythm)이 남들보다 취약하게 태어났다는 것이었다(하지만 이 부분 역시 몇 년이 지나 의사인 지인에게 물어보니 불분명한 부분이 있어 학술적인 재확인이 필요하다).


가족 모두가 절망했다. 원했던 답을 찾지 못해 낙담한 기독교 집안에서 할 수 있는 보루라고는 매일 밤 나를 위한 기도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같은 밤, 다른 신에 기대 보면 어떨까 하는 의문을 품은 불효녀는 인터넷에 ‘굿 하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 역시 나름의 방법으로 간절히 악몽을 끝낼 방도를 찾으려 했을 뿐이었다. 나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빙의된 상태라면 좋으련만 싶었다. 귀신 까짓 거 쫓아내면 그만이라는 심정이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현수가 앓던 수면장애는 나와는 현저히 다른 심각성을 가진 몽유병을 다루고 있는데, 그럼에도 부러웠던 포인트가 있었다. 아래부터는 영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조심.


일단 첫째, 본인은 속 편히 자더라. 그 깊은 숙면의 상태가 영화적으로 더 큰 공포감을 줬지만 나는 보는 내내 부럽기만 했다. (수진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건만 얄미워서 내가 다 얼굴을 할퀴고 싶었다.)


둘째. 단 한 번 약 처방을 바꾼 것만으로도 완쾌한 것. 약을 재차 바꿔가면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부작용들과 일종의 ‘희망공포증’을 거치지 않고도 현수는 정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셋째. 마지막으로 아내 ‘수진’의 존재.

영화 내내 가훈으로 ‘둘이 함께라면 극복하지 못할 역경은 없다’는 표어를 내비치는데, 그 구태의연한 신혼부부의 알콩달콩함에 내가 다 든든했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면 다 견딜 수 있다는 낙관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지쳐가는 상대를 보는 일은 고역이라 차라리 혼자를 택해왔던 나와 현수는 그렇게 달랐다.




하지만 든든한 가족 덕에 아무리 혼자려 한들 ‘철저한 혼자’는 될 수 없었고, 그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 듬직한 고양이 옹심이도 있지. 그러니 ‘수진의 존재가 부럽다’는 세 번째 포인트는 급히 철회해야겠다.


지금도 내 옆에 옹심이가 있다. 지난밤 내가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따위는 제 알바 아니라는 듯 이선균보다 더 속 편히 오수를 즐기는 모습이다. 얄밉다가, 살짝 벌어져 있는 입이 조금 바보 같아 보여 웃음이 났다. 그래, 나는 현수가 부럽지 않다. 몽유병이 아니어서, 이렇게 옹심이가 안전해서 다행이다.


불면증은 계속되고 있지만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일랑 접은 지 오래다. 역시 나에게 ‘굿’과 ‘미신’이란 한편으론 터무니없고, 또 다른 한편으론 무섭다. 어느 정도 맞는 처방약을 찾았기에 덜 절실해진 덕도 있겠다. 굿하고 불면증이라도 나아 박수무당이라도 됐으면 벌이라도 좋았으련만, 뭐. 역시 내겐 너무너무 무서운 세계다.


오늘은 비 소식이 있어 작은 우산을 챙겼는데, 하늘이 맑고 구름이 예뻤다. 수면위생 원칙 중 하나인 비타민D를 쬐기 위해 한 시간 즈음 햇빛을 맞으며 산책을 했다. 사탄처럼 귀신도 햇빛을 싫어하지 않을까?  과거 언젠가 내가 층간소음이라도 유발해 스트레스를 줘 천도하지 못 한 귀신이 내 안에 있다면 내쫓는다는 기분으로 걷고 또 걷는다. 나는 희망을 계속해서 품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그럴 용기가 꺾일 때쯤 또다시 가족이 일으켜줄 테니까. 내 안의 귀신이 있다면 이제는 위기인 처지다. 할아버지 그러니 지금이 기회예요.  좋은 말로 할 때 얼른 나가세요.




영화 <잠> 중 그들의 수칙. 수면위생은 철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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