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문중일기 13화

다시 사러 오지 마세요..

팔아도 문제, 안 팔아도 문제

by Philip Lee
이력서.jpg


자영업의 세계로 들어선 지 좀 있으면 5년이다. 강산이 절반은 변했다. 그중 문구점을 선택했던 건 고객층 때문이었다. 문구나 학용품을 사러 오는 학생들, 놀거리를 사러오는 아이들만 생각했다. 왠지 쉬워 보였다(정확히 일주일 지나고, 나의 예상이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나의 완전한 오산이었다.


문구점은 아이들만 오지 않았다. 온 계층의 사람들이 다 오는 곳이었다. 엄마나 아빠들은 어린아이의 손을 이끌고 방문했고(아이가 이끄는 경우가 더 많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물건을 사러 오신다.


어른들은 대개 아이들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사러 오지만, 그것만 사러 오시진 않는다. 여러 가지를 사러 오신다. 정말 여러 가지다. 실, 가계부, 파일, 건전지, 조그만수첩, 매직, 압정, 돼지저금통, 포장지, 지방쓰기, 고무줄, A4용지, 편지지, 빗, 옷핀, 철끈, 셔틀콕, 종이접시, 종이컵, 비닐끈 ....


어르신들이 “OO 있어요?”라고 하시면, 난 부리나케 물건을 찾아 대령한다. 7평 남짓의 조그만 가게에 꼭꼭 숨어있는 물건을 찾는다.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도 든다(1년에 몇 번밖에 안 나가는 물건을 찾을 때는 가게를 뒤엎는 기분).


그래도 용케 찾아 물건을 전달하면, “우와! 정말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라는 말은 듣지 못할지라도 나름 뿌듯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다른 건 없어요?”라고 물으면, 다시 상품 없는 보물찾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물건을 찾는 것이 문구점 일상의 7할 이상은 되는 것 같다. 그중에서 꾸준히 잘 나가는 효자 상품이 있다. ‘어! 문구점 올만한 나이는 아닌데’라고 생각되는 20대 중후반의 젊은 사람이 오면 100%. 그중, 열이면 여덟아홉은 이것을 찾는다.


“이력서 있어요?”

(이렇게 자주 찾는 물품은 카운터 바로 뒷자리에 둔다. 바로 찾아서 줄 수 있게 고안한 것이다. 역시 가게짬을 먹으니 JQ(잔머리지수)만 늘어난다.)


‘문구점에서 별 걸 다 파는구나’ 내가 팔고 있으면서도 새삼 느낀다. 하긴, 각종 양식을 팔고 있다. 견적서, 부동산 매매계약서까지...


‘이력서’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봉투, 거기에 양면스티커까지 들어있다. 이력서 한 개만 사면, 이력서부터 자기소개서까지 쓰고 봉투에 붙이면 끝이다. 친절하게 자기소개서 작성요령과 예문까지 들어있다.


어쨌든, 이력서를 찾는 사람이 많다. 특히나 3월을 앞둔 요즘, 많이 찾는다. 어떤 경우는, 사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사람이 또 와서 사 가기도 한다. 팔긴 팔지만, 왠지 씁쓸하다.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젊은 사람들만 이력서를 사는 게 아니었다. 머리가 허옇거나, 벗겨지기 시작하신 분들, 딱 봐도 오십은 되어 보이시는 분들도 사러 오신다. 자식의 부탁으로 사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명퇴나 다른 이유 등으로 재취업을 생각하시는 분들이셨다. 즉, 정말로 이력서가 필요해서 사러 오신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가끔 묻기도 한다. “이력서 어떻게 쓰는 거에요?” 난 이력서 쓰는 요령을 손으로 짚어 드리며 대강이라도 알려드린다. 내가 곰살맞지 않아서 “요즘 취업이 쉽지 않죠? 좋은 결과 있으셨으면 좋겠네요.”라고 말을 덧붙이지는 못했다. 그저 그분이 원하시는 곳에 취업하셔서 다시 사러 안 오시기를 바랄 뿐....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력서가 별로 안 나갔다. 요즘은 하루에 한두 개는 기본으로 나간다. 방학에는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이런 거라도 나가면 고맙지만,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들, 그리고 다시 펼쳐질 인생의 2막을 힘겹게 시작하실 어르신들... 이력서를 많이 사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력서 못 팔면 어떡하냐고? 뭐, 다른 거 팔면 되지...

keyword
이전 12화문제가 나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