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계획대로 안 살 거

생활계획표

by 윤지WORLD

휴일엔 하고 싶은 게 많다.

일하지 않는 날의 일상은 심플한데

대개 읽거나 쓰거나 그 두 개를 다 하거나.

가장 기분이 째질 때는

그냥 남의 글 읽을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대본도 쓰고 브런치에 글도 썼을 때

성실한 인간으로 한 단계 진화한 것 같달까.

오늘은 그날을 노리고 전날 밤부터 이 읽고 쓰고를 다 할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다.

방점은 '어디서' 하느냐에 맞췄다.

내 온갖 영감의 원천이 튀어 나올 낯선 타인의 근교 시골에 갈 것!

난 원래 이런 일정에 은근 진심이고 간만의 창작여행 생각에 꽤 들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을 체감할 때가 언제인가를 누군가 묻는다면,

난 원래 잘 하던 짓을 잘 못하게 됐을 때 라고 답하겠다.

버스를 두어번가량 갈아 타는 것쯤이야 두발의 자연한 복종이고 퇴근 후의 심야버스에서조차 생기발랄하던 지난 날이 꿈 같이 여겨졌다.

나는 집앞의 쾌적하고 주인장이 친절하며 커피와 말렌카가 심히 맛있는 카페를 두고 왜 그런 비합리적인 계획을 이행할 생각을 하는지를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간의 번민 후 캡모자에 선크림을 챱챱 바른 나는, 집앞 카페에서 아아를 홀짝이고 있다.

몸이 편한 게 지상최고의 행복이 아니겠냐며.

이렇게 난 가성비와 어차피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진리에 대한 맹신을 더했고 지난 날의 낭만을 잃었다.

부끄럽지 않다.

주인장이 친절한 집앞 카페에서 난

유시민 작가님의 신간을 통해 그간 수업할 때 반영론적 관점에서의 시 이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껄쩍지근함을 남겼던 그놈의 베트남전쟁에 관한 구절을 비로소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 체득의 기쁨에 취해 홀가분한 마음으로

쓰던 대본을 크게 진척했고

지금 그것들에 대한 자랑을 브런치에 쓰고 있다.

해서 결과적으로

남의 글도 읽고 대본도 쓰고 브런치에 글도 쓰기를 완수했다.

오히려 좋아를 외치는 합리화의 날들이 늘어가고

좀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내 일상이

나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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