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04.01
어느샌가 모든 게 익숙해진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시작의 설렘보다는 나의 과거에 대해 약간의 향수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런 게 나이가 먹은 건가 싶었다.
엄청나게 오랜만에 많은 짐을 옮겼다. 아마 휴학을 하고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여행을 할 때 백팩 하나를 메고 다니면서 정말 힘들어도 이 정도는 내 삶의 짐이라고 생각하며 그 큰 가방을 짊어지고 여행해왔는데 정말 내 삶을 꾸리려 보니 짐을 어마 무시하게 많이 싸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와 아빠까지 총동원해 내 짊을 옮겨다 이사를 도와주셨다. 이사하고 며칠 동안은 새로운 곳의 낯섦에 또 혼자라는 공허함에 잠이 잘 오지 않기도 했다. 외로움을 떨치려 꾸역꾸역 싸가져 간 빔프로젝트로 영화를 자주 보기는 했지만 누군가와 얼굴을 대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교수님과 함께하는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없었기에 어느 날은 대화할 일이 없어 입에서 하루 종일 단내가 나기도 했었다.
수업에 들어가면서 당연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재학 시절 계셨던 교수님들이 모두 계셨고 나는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교수님께 찾아가 지난날 내가 독립 출판했던 책을 드리며 휴학기간을 이렇게 지내왔다고 말씀도 드렸고 나름대로 장학금을 위해 열심히 머리를 싸매가며 과제를 하기도 했다. 좀 놀라웠던 건 내가 학교에 재학할 때는 40대-50대 분들도 편입을 해서 같은 과실에서 작업을 하시기도 하셨었는데 지금은 모두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어서 처음에 전공수업을 들어가고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정말 제일 힘들었던 건 학교의 커리큘럼이 변경되면서 우리 학과인 회화학과와 도자공예, 금속공예가 합쳐져 조형예술학과가 되었는데 원래 있던 각 과의 수업의 개수가 줄어들면서 나는 회화학과 수업만 듣고서는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원래 취미였던 도자공예 수업도 함께 수강 신청을 했다. 3학년 수업만 듣기에는 내가 도자기에 대한 기초 지식이 너무 없어 2학년 수업과 함께 듣게 되었다. 나는 그 덕에 수업에 들어가는 곳마다 처음 보는 내게 하는 많은 질문에 답변을 했고 그렇게 이곳저곳 모든 수업에 나는 12학번 29살 김수연인 게 들통나 버리기도 했다. 도자기에 관한 기초지식이나 과제 양에 있어서 따라가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얼굴이 철판이 깔려버린 복학생의 나는 교수님과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에게 정말 많은 질문을 해가며 물음표를 느낌표로 만들어가고 있다.
사실 지금 모든 것을 다 떠나서 내 머릿속엔 장학금이 가득하다. 25살인가 26살이 되던 해 도와줄 수 있을 때 복학하라던 아빠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고 자신 있게 ‘내 학비 내가 벌든 대출을 받든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아빠 노후자금 모아 도돼’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장학금이 필요했다. 한 학기에 460만 원에 플러스 재료비, 생활비인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방학을 제외하면 학교는 거의 3,4,5월에만 다니고 있었고 한 달에 약 150이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가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계속 해낼 수 있다고 뇌를 인식시키면 그렇게 몸이 행동을 한다고 하던데 그래서 나는 요즘 내 뇌에 ‘나는 무조건 장학금을 받을 거야. 받을 수 있어.’라는 문장을 인식시켰더니 나이가 들어서 인 건지 옛날 재학 시절보다는 훨씬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부디 이번 뇌 인식 프로젝트를 성공해서 이번이 지나고 또 다른 목표가 생겼을 때도 이번을 발판 삼아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고 나 자신에게 소망했다.
뭐 사람은 먹고 자고 싸는 걸 해야 하긴 하지만 자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바쁘게 살다 보니 하루가 너무 짧다는 생각도 많이 들고 있다. 지금은 그리고 미래에는 하루를 아쉬워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 채워 살아가면 되겠지만 지나온 과거에 있어서는 좀 더 부지런하게 살면 더 좋은 무언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의 과거에 대해서 후회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나름대로 아껴 산다고 했지만 좀 더 악착같이 모았다면 내가 여행했던 모든 곳을 세계일주처럼 한 번에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바쁘지 않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닌 꾸준히 일주일에 하나라는 무조건인 전재를 깔아 두고 휴학기간을 지내왔다면 지금 내겐 그 결과에 대해 어마 무시한 게 남겨져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 같은 거 말이다. 사실 지금도 브런치 글 연재를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하고 싶은데 잘 안돼서 속상하기도 한데 나름대로 지금의 바쁨속에서 신경을 써가며 연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좋아하는 걸 하고 있는 나의 마음이 좀 더 좋으니까 말이다.
복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님과의 상담에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적성에 맞는 거 같다는 나의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 생각의 끝에는 내 형편에는 없을 것 같았던 대학원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언제부턴가 엄마에게 대학원 이야기를 했는지 학교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는 ‘수연아 너 대학원 가고 싶으면가 엄마가 도와줄게’라는 말을 했다. 떨릴 것 같은 목소리와 찡해지는 코끝을 진정시키고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냐는 나의 말에 엄마는 ‘조교 하면 학비 전액 지원해주거나 반은 내준다며 네가 열심히 하면 엄마가 재료비나 생활비는 해주면 되잖아. 그리고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거 같으니까 그렇지.’라고 했다.
뜬금없는 엄마의 말에 힘을 입어 가고 싶었던 대학원의 학비를 찾아봤다. 어마 무시한 학비에 그 학비를 지원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현실적인 생각이 다시 들기는 했지만 나에게도 나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자체에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고 툭툭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를 감격스러움에 눈물이 뚝뚝 흐르는 29살 복학생의 3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