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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Apr 24. 2022

'착한 남자'가 평등한 연애를 하지 못하는 이유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이성애

"연애에 대한 강의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아하 청소년 성문화센터에서 '연애'를 주제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 적잖이 당황했다. 제 아무리 '성평등한 연애'거나 '페미니즘적 연애'가 주제가 된다고 해도 쉽게 말할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이성애 독점 관계' 이외의 연애에 대해선 무지하기 짝이 없다. 물론 이성애 독점 관계 역시 잘 안다고 자신하기 어렵다. 연애는 굉장히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평가하거나, '롤모델'을 특정하기도 어렵다. 하물며 내가 산전수전 다 겪었다거나, 엄청 모범적인 연애를 해와서 '간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젊은 남성들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워낙 적은지라 강의를 수락했고, SNS를 보고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호응을 해주신 것에 부담이 가득한 채로 20대 남성을 대상으로 <'성평등한 연애'의 가능성을 묻다> 강의를 진행했다.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1.연애는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행위고, 사회 구조에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 전자의 측면만 너무 강조해선 안 된다. 2. 평범하게 한국 사회에서 자라온 남성이 '성평등한 연애'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움. 가부장제 안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남성성 모델은 결코 평등하지 않기 때문 3. '좋은 남자', '착한 남자'는 성평등의 목표가 아님. 여성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나와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 생각해야 함. 이렇게 대략 세 가지 정도다.


사실 강의를 준비하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기분은 인간끼리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연애는 생판 모르는 남을 항상 의식하면서 마음을 쓰고, 이해하고, 눈치 보고, 생각을 가늠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일의 끊임없는 반복일 수밖에 없다. 혹자가 연애가 너무나도 쉽게 느껴진다고, 즐겁기만 하다고 말한다면, 아마 상대방에게 연애에서의 책임이나 고민을 상당 부분 전가한 것이 분명하다. 일방의 희생이 없거나 최대한 줄이는 방식의 평등한 연애는 너무나도 어려운데, 그저 "사랑하면 다 괜찮아"라고 사회가 쉽게 말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전부터 '맨박스 탈출'을 넘어서, 자기 중심적인 면모를 탈피한 '더 나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가부장제에서 남성의 이성애는 본인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여성을 지배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남성인 자신의 사랑이 '억압자의 사랑'이 되는 상황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성 역시도 페미니즘을 통해 구조적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내가 가부장제의 잔재를 전부 지우고, 성별 고정관념을 타파하자고 간단히 정리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평등한 연애에 '왕도'가 있다고 보긴 어려워서다. 개인의 욕구가 천차만별이고, 각자의 사정도 달라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다뤄야 하는 사례도 너무나 많다. 남성이 여성에게 수동적이거나 '조신한' 모습의 성 역할을 요구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겠지만, 반대로 여성 역시 가부장제의 규범적 남성성을 잘 보여주는 남성을 원할 수 있다고 본다. 사회가 줄곧 그러한 남성을 '멋진 남성'으로 묘사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 남성들은 '여성이 원하니까'라는 명목으로 가부장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생길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성애 독점 연애'를 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여자와 남자는 각자의 역할 수행이 '몸에 맞는지'를 계속 가늠해나가야만 한다고 믿는다. 연애에서의 둘의 모습은, 일정 정도 사회가 '표준'이라고 부여한 역할을 따라가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수많은 연애 관찰 예능프로그램에서 남성이 운전을 하고, 데이트 코스를 짜는 모습은 고정불변에 가깝다. 그런데 '왜 꼭 그렇게 해야 할까', 의심을 해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욕망을 상대방에 투사해왔는데, 이러한 욕망 역시도 사회적으로 학습되어왔다.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내 욕망과 마음이 이끌리는 부분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남성 중심'을 벗어난 성평등한 관계를 위한 노력 역시 게을리 할 순 없다. 타협점을 계속 찾고, 또 갱신해나가는 게 유일한 답이다. 아래는 강의의 일부를 느슨하게 정리한 내용이다. (1시간 40분 동안 말로 풀어낸 것을 글로 정리했기 때문에 조금 길다)



- 여성과 남성의 이성애 연애가 불평등한 이유는 일단 사회적 위치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여전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로 유지되고 있다. 가부장제는 여성과 남성의 결합을 통해 남성을 집의 주인으로 세우는 '정상가족' 형태가 기본값이다. 결국 둘의 관계가 어떻든, 우리 사회는 둘 중 남성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힘을 부여하게 된다.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 경제적 격차 등까지 감안하다면 둘이 같은 '스펙'이라고 가정했을 경우, 아무리 연인이라고 할 지라도 마냥 평등하다고 보긴 어렵다.


그리고 여성의 연애와 남성의 연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일단 동등하지 않다. 한국 사회는 여성의 '잦은 연애' 혹은 여성의 구애 등 여성이 연애에 있어서 적극성을 보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남아있던 '정조 관념'의 영향에서 비롯됐다. '정조'라는 말이 법에서는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여성을 평가하고 옥죄는데 영향을 준다. 동시에 섹스에서의 임신 위험이 너무나 큰 불평등을 만든다. 연애 자체가 여성에게 '리스크'일 가능성이 높은데, 남성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

 

또 하나는 연애는 여성성 수행의 압박을 엄청나게 강화한다는 점이다. 물론 남성성 수행의 압박도 있지만, 여성이 받는 압박의 범위나 강도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대체로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상'을 연애에서 보여주길 원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 스물세 살 겨울에 소위 '연애다운 연애'를 처음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왜 이렇게 연애를 못하고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굉장히 심했다. 남자가 (이성애) 연애를 못하면 뭔가 '무능력'한 것처럼 여겨지는 문화가 싫었지만, 동시에 기회가 생긴다면 꼭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연애라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자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방법이기도 했고, 그래서 내게는 도전하거나 쟁취해야 될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참 어려웠다. '연애'를 모사하기에 급급했다는 표현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정형화된 '멋진 남자친구'의 모습이 내게는 벅차게만 느껴졌던데다가(지금의 나보다는 상당히 마초적이고 싶어했던 것으로 기억), 상대방과 생각이나 욕구가 부딪힐 때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동시에 이것이 '남다른 관계'라는 생각이 너무 큰데서 오는 혼란도 있었다.  


지금의 나는 '괜찮은 남자'인가? 그렇지 않다. 나 역시도 연애에서 어리석고, 모순적이며, 속물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반복하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머리를 쥐어싸매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상대방에게 '사랑'이라는 말로 이해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적어도 나의 문제점에 대해 일상적으로 빈번하게 논해질 수 있는(일방적인 지적이 아닌) 관계가 좋다고 생각한다. 


- 연애 과정으로 볼 때 구애와 고백의 과정은 많은 남성들에게는 꽤나 큰 스트레스다. 마음을 표현하고, 관계를 규정짓는 일은 대체적으로 '남성의 역할'처럼 이야기된다. 당연히 남성이 이성애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져가는 가부장제 사회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제는 남자들이 구애와 고백의 어려움에 대한 해법을 이상한데서 찾거나, 오히려 '용기'라고 정당화시켜서 폭력적인 구애를 한다는 점이다.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이라는 내 첫 책의 제목은 그러한 남성들의 잘못된 구애 문화를 꼬집은 부분이다. 책 제목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을 성애화된 존재로만 바라보는 '성적대상화'가 매우 자연스러운 문화이기 때문이다. 


성적대상화는 여성을 '사람'으로 판단하고 감정을 교류하면서 관계를 맺어야 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연애 대상이나 유희의 도구로만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하 직원, 제자, 카페 알바 등등을 모두 로맨스 대상으로 생각하고 구애하고 고백한다. 이는 사례에 따라선 스토킹이나 권력형 성폭력에 가까운 경우도 많다.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이를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건 고백은 무조건 '용기'라고 말하는 문화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열 번 찍으면...' '골키퍼 있어도...' 이런 수사들이 통용됐다. 그러니까 이건 계약서의 내용도 보지 않았는데, 혹은 계약서의 내용이 아직 작성되지도 않았는데 일단 사인부터 하라는 것에 가깝다. 고백은 사실상 서로의 합의하에 계약서를 다 만들어놓고, 마지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사인을 하는 수준의 일이고, 굳이 따지자면 용기를 낼 게 아니라 눈치를 잘 봐서 적절한 타이밍에 하는 게 중요하다. 


연애가 분명 특별한 관계인 것은 맞지만 통상적인 인간관계의 원칙이 아예 무시되진 않는다. 무엇보다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일지언대, 사람의 마음을 얻는 통상적인 규칙들을 무시하고, 혹은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지도 않으면서, 남자만(구애하는 사람만) 잘하면 된다고, 묘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 '좋은 데이트'의 정석은 없다. 물론 연애 초반에 수행하게 되는 성 역할 분담에서는 벗어나는 게 조금 더 평등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트 시그널, 체인지 데이즈, 환승연애 같은 연애 관찰 예능들은 데이트를 '남성 중심의 이벤트'처럼 묘사하고, 이는 데이트의 이데아(?)를 만들며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평등한 데이트란 무엇인가를 자꾸 '해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를 조정해서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무수한 과정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폭력과 욕설 등이 폭력이라는 점은 99%의 사람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행동 통제'도 엄연한 데이트 폭력이다. 그러나 "~을 하지 마라"라는 말이 모두 폭력이 될 순 없다. 맥락에 따라서 이는 조언이거나 충고, 장난 섞인 투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데이트폭력에 해당하는 '행동 통제'일까. 


사실 일률적인 기준을 세우기는 어렵다.  다만 "~을 하지 마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거부할 수 있느냐, 혹은 '논의'가 가능한 관계인지는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지적을 그대로 이행해야 하는 불평등한 관계라면, 언제든 데이트 폭력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아직도 데이트 비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는 '알아서 하라'가 나의 결론이었고, 사실 지금도 '둘의 경제적 사정에 맞춰서 하라' 이외의 대답은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왜 남성들이 더 돈을 많이 내야 하냐고 불만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선, '임금 격차'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100:64다. OECD 국가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극심한 국가 중 하나다. 20대에는 스펙이 같아도 17.4% 임금 차이가 나고, 30대가 되면 '경력 단절'로 인해 경제 활동 인구 비율이 90:64가 된다. 아마 과거에는 이런 성별 간 경제력 격차가 더 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데이트에서 누가 돈을 내야 했을까? 바로 남성이다. 그러니까 남성이 데이트에서 돈을 더 내는 상황이 억울하다면, 역설적으로 성차별을 없는, 성별 임금격차가 없는 사회를 위해 함께 노력하면 된다. 


데이트 비용 문제는 남성이 차별받는 현상이 아니라, 지독한 '여성 차별'의 결과물이다. 페미니즘의 앞길을 막으면서, 정작 여성들이 돈을 쓰길 바라고 있으니 어불성설이다.


- 스킨십과 섹스는 끊임없는 동의의 문제다. '끊임없는'이 포인트다. 순간순간마다 갱신이 된다는 뜻이다. '교감'은 매우 즉각적이며, 타인의 신체와 닿는 몸의 느낌 역시 일정하게 유지되진 않는다. 전적으로 각자의 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의와 거부와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평등한 관계를 만들고, 이를 신뢰와 융통성이라는 두 축으로 지탱해야 한다. 신뢰는 상대방이 동의와 비동의를 계속 가늠하며 어느 상황에서도 나의 의사를 존중해줄 것이라는 믿음이며, 융통성은 '성적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서로의 욕구를 맞춰나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나는 동의의 맥락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명백한 권력이 작용하거나, 상대방이 의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어려워하는 등 불평등한 관계에서의 '동의'는 결코 동의가 될 수 없다. 


- 연애는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의 타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압력과의 타협이기도 하다. 연애가 오롯이 둘만 잘하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벗어날때, '우리'를 둘러싼 구조가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살필 수 있게 된다. 당연히 지금 '우리'의 관계가 결코 평등하게 맺어질 수 없게 만드는 구조에 순응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젠더 불평등이 연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성평등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 성평등한 연애는 "내가 지켜줄게"라는 말로 일컬어지는 '좋은 남성'이 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겪고 있는 불평등과 폭력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를 위해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선 단순히 무언가를 평가하거나 좋고 싫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약자·소수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만, 페미니즘을 여성을 위해 배려하거나 참으라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에 더 가깝다.


*참고 글

<어떤 고백은 폭력이 된다>


<남자들에게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식탐남의 탄생>


<남자들이 둔감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


<의무는 없다>

https://www.facebook.com/yesrevol/posts/4810015819070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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