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든 소설이든 첫사랑의 서사는 대개 비슷하기 마련이다. 우선 첫사랑은 기억 속에 박제되어야 한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연정인(임수정 役)처럼 지금까지도 첫사랑에 대해 말하고, 그를 만나는 사람은 이혼 대상이 될 따름이다. 둘째, 후회의 요소가 존재해야 한다. 《건축학개론》의 승민(이제훈 役)은 ‘그때 내가 용기 있게 행동했다면 오해하지 않았을 텐데’라며 과거를 후회한다. 셋째, 첫사랑과의 재결합은 거의 불가능해야 한다. 첫사랑은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만 한다. 《 시라노》, 《건축학개론》, 《너의 결혼식》,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등 첫사랑을 소재로 한 대다수의 영화는 충실하게 이 공식을 따른다.
그런데 첫사랑-서사는 일반적인 로맨스-서사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공통으로 ‘사랑’이라는 낱말이 들어가긴 하지만, 서사 공식에 명확한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로맨스-서사는 이렇다.
•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진다.
•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만난다.
• 장애물을 뛰어넘고 사랑이 이루어진다.
반면, 첫사랑-서사는 다음과 같다.
• 한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
•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만난다.
• 사랑에 실패한다.
다시 말해, 일부러 비극을 강조하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로맨스-서사는 사랑이 성공으로 끝나는 반면 첫사랑-서사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정확히는, 첫사랑-서사는 실패로 끝나야만 한다. 왜냐면 이 서사의 목표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아이러니한 서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게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첫사랑-서사는 일종의 성장-서사로 분류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이 서사의 공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성장-서사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 한 사람이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 장애물을 만나 극복한다.
•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첫사랑-서사를 성장-서사 공식에 대입하면, 주인공이 경험하는 첫사랑의 과정은 (첫사랑이라는) ‘처음 접하는 낯선 감정’을 극복하는 과정이 된다. 그러므로 주인공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도리어 장애물을 극복하고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첫사랑-서사는 로맨스-서사가 아니라 도리어 성장-서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첫사랑은 그것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둘째, 첫사랑을 극복하고 다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지만 비참하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잡하지만 희망적이다.
첫사랑의 공식에서 살펴봤듯이 첫사랑은 응답받지 못한 사랑이다. 응답받지 못하는 사랑의 종류에는 첫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첫사랑은 ‘최초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응답받지 못한 사랑과는 다르다. 첫사랑-서사의 시작은 사랑에 대한 한 남자 또는 여자의 적극적인 깨달음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름대로 사랑을 표현하는 지점부터 첫사랑-서사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최초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결단한 사랑이, (비참하게도) 응답받지 못한다. 첫사랑-서사의 주인공은 이를 후회의 방식으로 회고한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러한 후회가 삽입되는 까닭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후회하는 바처럼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정말로 그 사랑이 이루어졌을까? 아니다, 평행우주론처럼, 그 지점부터 다시 후회의 회고가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첫사랑이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이며, 이는 그 자체만으로 비극적이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인 “첫사랑을 극복하고 다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가?”로 넘어가 보자. 첫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나 문학의 훌륭함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이 질문을 얼마나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게 대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똑같은 대중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너의 결혼식》은 비교적 금방 잊히지만 《건축학개론》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너의 결혼식》의 서사는 환경 또는 상황에 의해 첫사랑이 계속 실패하는 서사 구조로 되어 있지만, 《건축학개론》의 서사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은 자신의 열등감을 놓고 고민하며, 그 결과 승민은 어렵사리 첫사랑을 극복하여 아름다운 추억은 추억으로만 남겨두기로 결심한다. 즉, 전자의 주인공은 딱히 성장을 이뤘다고 볼 만한 지점이 없지만(주인공 우연(김영광 役)은 그저 첫사랑에 실패한 사람에 불과하다), 후자의 주인공은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현재의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사랑을 극복한다는 점은 첫사랑-서사를 더 이상 로맨스-서사로 분류할 수 없음을 뜻한다. 첫사랑-서사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주인공의 ‘성장’이다. 갖고 있던 트라우마를 극복하든,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든, 저마다의 방식으로 첫사랑을 극복하는 것이 첫사랑-서사의 과제다. 이러한 점에서 첫사랑-서사는 성장-서사와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으며, 일반적인 로맨스-서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거창하게 서사 공식을 끌고 오긴 했지만, 이는 실제 삶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첫사랑은 명백한 ‘사건’이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첫사랑은 나의 사랑이 반드시 응답받을 수는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넘어 다음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만약 첫사랑에서 이를 깨닫지 못하면, 삶의 첫사랑-서사는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로맨스-서사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첫사랑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러므로 첫사랑-서사는 사후적으로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시기적으로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 처음으로 키스한 사람 등은 첫사랑의 기준으로 적합하지 않다. 자기 극복의 서사를 거치고 로맨스-서사를 처음으로 경험한 바로 직전의 사랑,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다.
* 예를 들어 부모님 역시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대개 응답받지 못한다. 짝사랑 역시 응답받지 못한 사랑의 한 종류이다.
** 신형철 평론가는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사고’와 ‘사건’을 구분한다. 사고는 ‘교통사고’처럼 원상복구를 목표로 한다. 최선을 다해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반대로 사건은 원상복구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퇴행’이 된다. 소설에서, 사건을 겪은 주인공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