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유 Oct 04. 2023

소설의 첫문장같이

 경상북도 문경에 일을 하러 내려갔을 때 손금을 봐주는 사람, 이른바 손금쟁이가 있어서 그에게 잠시 손금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일행 중에는 나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셋의 손금을 본 그는 “보아하니 셋 다 이미 인연은 지나갔구먼. 이제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그럼, 인연이라는 사람은 누구였나요?” 그러자 그의 대답.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 있잖아? 그 사람이야.”


 영화 <건축학개론>의 리뷰를 찾아보다가 ‘첫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 있어 주의 깊게 읽어봤다. 글쓴이는 첫사랑에 대해 ‘상처를 깊게 남긴, 잊을 수 없는,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변하게 만든 사랑’이라고 정의 내렸다. 탁월한 정의라고 생각했다. 만약 맨 처음 사랑을 첫사랑이라고 한다면 초등학교 5학년 때 한창 놀리고 괴롭혔던(!) 혜빈이가 내 첫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혜빈이와는 딱히 연애까지 이어지지도 않았고, 설령 이어졌다 한들 내 삶에서 크게 변할 것은 없었다. 애초에 그때는 연애라거나 사랑의 개념조차 잘 몰랐으니까.


 헷갈리는 사람은 있었다. 분명히 좋아했던 그러나 첫사랑이라 하기엔 조금 아리송한 사람. 아파하기도 많이, 오래 아파했는데, 첫사랑이라 하기엔 조금 시시한 면이 있었다. 아픔이 끝나자 좋아했던 마음도 금방 사그라들었고 시간이 지난 뒤엔 '저런 사람을 사랑했었나?' 싶을 정도로 콩깍지가 완전히 벗겨져 버렸다. 이 점에서 나는 앞선 글쓴이의 정의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사람은 결국 나를 변하게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말하자면 ‘풋사랑’이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조금 달랐다. 좋아하기도 오래 좋아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면이 있는 풋사랑과는 달리 첫사랑은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때 이후 나쁘게 말하면 자기 비하와 열등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냈고, 좋게 말하면 더 좋은 사람,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이 되었다. 난생처음 패션 잡지를 읽기 시작했고 머리 모양도 바꿨다. 함께 가고 싶은 여행지를 ‘나만 보기’로 SNS에 공유했고 그녀의 친구에게 은근슬쩍 동향을 묻기도 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인공지능 애플리케이션으로 속마음을 떠보기도 했다.


 사랑을 시작하고, 달콤한 꿈을 깨고, 그리고 망상마저 끝이 나기까지. 수차례의 망설임과 설렘, 실망을 겪으며 나는 크게 변화했다. 일단 언제 어느 때고 일이 없으면 안 되는 성격이 되었다. 오직 일만이, 일을 하는 그 시간만이 첫사랑의 상처를 견디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내가 냉소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일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첫사랑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첫사랑은 소설의 첫 문장과도 같았다. 완전한 변화를 체험하기 전까지 그것이 복선이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나중에야 비로소 그 모든 의미가 이해되는.


 사랑은 더 나은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랬다. 많은 사람이 특히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앞서 건축학개론의 리뷰를 작성했던 사람이 덧붙인 말처럼 ‘성욕을 느끼기 이전의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욕망하기 이전에 누군가를 순수하게 열망했던 감정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그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아서, 날 부르는 목소리가 좋아서, 웃는 모습이 좋아서, 심지어는 또박또박 걸음걸이까지. 그 ‘사람’의 ‘삶’을 사랑했던 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사람은 지워지고 삶은 더욱 뚜렷해진다. 계산할 수 있는 연봉, 몸에 걸친 옷과 가방, 그리고 부모, 나아가 부모의 삶까지도. 그녀만이 갖고 있던 삶의 슬픔까지 사랑했던 나는 어디로 갔나. 삶이 지워질수록 ‘그 사람’은 더욱 선명해진다.


 처음에 물어본 사람에 이어, 나는 손금쟁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그 사람과 다시 잘될 가능성은 앞으로도 없나요?”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는 것부터 이미 끝난 것 같네요!” 손금쟁이는 그저 미소를 띠었다. 그래, 첫 문장은 이미 쓰였다. 이제 첫 문장은 잊힐 만한, 흥미로운 다음 문장을 써야겠지.

                          

<작가의 글쓰기 원칙>

첫째,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첫 문장을 써라.

둘째, 첫 번째 원칙을 기억하면서 다음 문장을 써라.



@AIGreem #소설의첫문장


이전 05화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