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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절미 Apr 28. 2016

우리는 모두 한 사슬에 연결된 고리에 불과하다

잉절미 시즌2 목요모임 0421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안건들을 잡아 채서 글로 묶어 둔 날이었다. 발행 시간과 다음 주제 등을 정하고 나니, 뭔지 모를 분위기의 환기를 느꼈다. 


아댕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루 빠진 헬스장에 다시 가기 쉽지 않은것처럼 글쓰기를 한 번 빠지니 다시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다행히도 돌아올 곳을 잘 유지해줘서 꽤나 기뻤다.

비록 글로 남기진 못했으나 저번 주제였던 가족에 관한 책을 읽긴 했다. 꼼꼼히 읽은 여파인지 그 뒤 한동안 책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치않게 마츠다 미리의 책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마치 마중물처럼 다음 책들을 읽기 위해서 후루룩 읽었다. 소소하게 수필같은 만화였다. 글도 적고 읽기도 빨리 읽을 수 있었다. 훈계하지 않지만 생각해볼꺼리 남겨줬다. 징검다리같은 역할을 해줘서 고마운 책이다. 모임에 들고 갔더니 잉원들이 빌려가기도 해서 나름 뿌듯함까지 안겨줬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긴 쉼에도 돌아올 곳을 남겨둔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 Hayley: 돌아올 곳을 잘 유지해준 거 고마운 거 공감 ㅋㄷ 이런 댓글 시스템도 만들어 두고..! 우리 잉원들 기특해~


Hayley

400p 넘는 두꺼운 책인데... 읽는 속도가 느린 나는 얼마나 읽고 이해할 수 있을는지...?!

(브런치 이벤트로 인해 구독자가 무척 늘어서, 뭔가 엄청난 고민이 담기고 생각의 과정이 담겨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이번 모임에서 나는 이 책의 서론과 1장만 읽고 책 소개만 했기 때문에 정직하게 그것만큼만 기록해두겠다.)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우리가 다음 모임의 주제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사실, 경제학은 내게 익숙지 않은 분야라서 뭐 낯설게 보고 말것도 없이 그냥 새롭게 접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책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이 책의 서문을 보고, 이 저자가 기존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경제학을 보지 않고 기존과는 다르게, 하지만 합리적으로 정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학을 잘 몰랐던 나지만, 막연하게 많은 사람들이 정의해놓은 경제학 토대 위에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그 자연스러웠던 토대의 실체는 어떤 것인지 자세히 관찰해보는 입장으로, 이것도 나름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것이 되겠다 싶어, 이 책을 읽어보기로 정하였다. 


서론과 1장까지 나온 내용 중 기존의 경제학과는 다른 관점은 다음과 같다.


1. 경제학은 과학이냐, 아니냐? 아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을 과학 분야로 정의하고 싶어한다고 한다. 과학으로 분류된다는 것은, 일반인이 참여하기 힘든 고도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전문가 집단이 내린 결론을 (거의) 그대로 믿고 따라도 무방한 영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경제학이란 "과학이 되는 것이 불가능(15p)"하다고 말한다. 왜냐면, 경제학이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살아가는) 복잡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도덕적인, 정치적인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곳이고, 따라서 전문가 집단의 결론이 현실을 정확히 예측하는데 실패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이 경제적 가치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나는 이 주장이 매우 타당하여 스스로 경제적 판단을 내리기 위해 경제 공부를 해야겠다 다짐하였다.


2. 경제학을 정의하는 두가지 방법 - 접근법 vs 다루는 주제

다른 학문들은 대개 다루는 주제로 학문의 영역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생물학은 생물을 연구하는 분야이고, 정치학은 정치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그런데 경제학은 접근법으로 정의되기도 하는 분야이다. 즉, 경제학을 인간의 "합리적 선택"이 들어가는 주제를 연구하는 분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경제학이 다루는 주제는 실로 세상의 모든 것이 된다(결혼, 출산, 범죄, 약물 중독 등 x 10^10). 하지만 저자는 경제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다루는 주제로써 정의되어야 한다고 믿고 그 주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돈에 관한 것(생산, 직업, 노동, 서비스, 복지제도 등)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가 이 책 1장까지의 요약이다. 다음 시간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다루는 주제로써 정의된) "경제학적" 문제와 결론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지 예시를 나누고 함께 가치판단을 내려보면 좋을 것 같다.





JB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 되었을 거다. 우물쭈물하다가 부반장이 되어버린 나는 윤리 의식이 투철한 아이였다. 지금은 '애들은 시끄러워야 건강하다' 라고 생각하지만, 당시 나는 선생님이 안 계실 때도 우리 반은 조용하고 모범적인 반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수없이 조용히 하라고 이야기하고 떠든 사람을 칠판에 적어놓아도 도저히 애들은 조용히 할 리가 없었고, 몇 번의 노력 끝에 (나도 그리 참을성이 있는 아이는 아니었으니 몇 번 안 되었을 테지) 나는 결국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사람은 변할 수 없다. 생긴 대로 사는 인생, 떠들 테면 떠들라지.


사람이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을까. 우리는 독서 모임을 하면서 변하고 있을까. 변하고 있다면 무엇이 우리를 달라지게 한 걸까. <가르칠 수 있는 용기>는 우리 독서 모임, 잉절미를 응원한다. 


객관론자와는 달리, 나는 진리가 지식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결론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결론은 늘 바뀌는데 어떻게 그 속에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진리가 열정적이고 기강 잡힌 탐구와 대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낡은 결론을 꾸준히 검증하고 새로운 결론을 환영하는 커뮤니티의 역동적인 대화라고 생각한다(197p)


우리는 커뮤니티 안에서 배운다.


물론 우리 독서 모임에 선생님이 있는 것은 아니고, 무언가 배워가자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독서 모임을 하고 있지도 않다. 즐겁기 때문에, 서로가 소중한 사람이 되어가고 모임이 소중한 곳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우리가 많이 배우고 있고 모두가 모두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고 있다고 느낀다. 


대한민국의 교육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엉망진창이지. 지식을 쏟아놓고 높은 숫자를 뽑아내려는 교육에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알파고의 발톱만큼도 못 쫓아가는 암기력. 내가 더 잘나야 한다는 경쟁심. 객관성과 숫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 약자에 대한 혐오와 우월감. 내가 배운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는 이제 갓 선생님이 된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지식만 쏟아내는 교육이 아니라 사람이 배우고 변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이다. 인간 불신에 빠진 어린 나에게도 용기 있는 선생님이 몇 분은 계셨다. 그분들 덕택에 나는 꽤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고, 이렇게 독서 모임도 하는 것 같다. 이제 곧 5월인데 조금은 감사함 속에서 살아볼까 한다. 


젯소 


왜 엮은이는 '영혼의 편지'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 새벽 세시에, 이 음악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BMsV7zmwG0&index=3&list=RDmSJdRQAQ0wc 


 독서 모임에 초기부터 참여했지만, 이제서야 처음으로 잉절미에 글을 써본다.

 (왜 하필 이 때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번엔 기필코 써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 


 내 글은 보통 자동 기술법에 의지해서, 조금 두서가 없을 수도 있고 생각이 이리저리 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나답게 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그렇게 쓰려고 한다. 



 어떤 책은, 어떤 영화는, 어떤 음악은 접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평지와 내리막길이라곤 하나도 없는 가파른 감정의 협곡을 오르고 나면, 며칠간 지속되는 마음의 근육통이 오기 때문이다.


 내게는 고흐의 영혼의 편지가 그랬다. 밑줄을 긋지 않고서는 못 견딜만큼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많아서, 펜 뚜껑을 열어 둔 채로 읽게 되는 책. 읽고 나면 문장들이 불쑥 불쑥 나를 찾아오는 책.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을 때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써 놓은 것 처럼 느껴져서 숨이 턱 턱 막혔는데, 영혼의 편지도 마찬가지었다. 그러나 고흐가 '빌더스보다는 밀레가 더 유익하다'고 했던 것처럼, 내게도 '다자이 오사무 보다는 고흐가 훨씬 더 유익하다'. (이유도 고흐와 동일하니, 궁금하면 책의 78p, 79p를 읽어보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 것 같다. (14p)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바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44p)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 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 이 야망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원한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왔고, 열정이 아니라 평온한 느낌에 기반을 두고 있다.(64p)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그가 예술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 인간 자체에 대한 그의 시선이 얼마나 따뜻한 지가 느껴진다. 


 이렇게 사람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 예술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온 열정을 쏟아 부은 사람이,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는 건,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슬픈 일이다.


 그는 1890년 7월 29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로부터 정확히 99년 뒤인 1989년 7월 29일엔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문장들로 위로받고, 그가 남긴 편지들을 통해 교감하고 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140년 쯤 일찍 태어났다면,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진실된 예술은 없다'고 말하는 그의 아름다운 영혼을 알아보고, 진정으로 들여다 봐 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 줄 수 있었을까?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150년 전에 태어난 고흐 이전에,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고흐들(잉원들)'의 영혼을 나는 충분히 들여다 보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많이 들여다 보고, 또 많이 듣는 앞으로의 나날들을 보내야지, 다짐해본다.


* 혹시 "예술가의 삶"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은, 그의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다음주는 "낯설게 보기"를 주제로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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