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미움 가득한 세상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슬픔이 마음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는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섬세한 사람은 아닌지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만 떠올렸지, 이런 디테일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세심한 아내가 고민하며 읽었던 책 한 권을 뒤늦게야 보기 시작했다. 백신이라는 의학적 내용이 남발하는 어려운 주제지만 아이가 정말 건강하게 자라길 바랐고, 부모로서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아이에게 행하여질 모든 일에 대해 알아야 할 책임이 있기에 천천히 책을 읽어 나갔다. 이 책 백신 안전 플랜은 아마존 베스트셀러이며, 꽤나 공신력 있는 두 명의 저자에 의해 집필되었다.
+ 폴 토마스
미국 여성잡지 레이디스 홈 저널에 의해 최고의 주치의로 선정되었고, 미국 의사 평가 회사인 캐슬 코널리에 의해 다년간 최고의 소아과 의사로 선정되었다.
+ 제니퍼 마르굴리스
아이들의 건강을 주제로 한 연구와 글을 쓰는 과학 저널리스트이다. 그녀의 글들은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와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 중 하나로 평가받는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실렸다.
이 책의 핵심 내용과 집필 의도는 책에서 발췌한 대로 다음과 같다.
우리는 백신이 그간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을 구해왔다고 믿는다. 오늘날 미국의 현대의학에서 백신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바는 일부 백신이 일부 아이들에게는 안전하지 않을 수 있으며, 현 CDC의 백신 스케줄 때문에 피해를 입는 아이들의 수가 의료전문가들이나 공중보건 담당자들이 흔쾌히 인정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 책은 급진적인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바로 자기 자녀의 건강과 관련하여 최상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이들은 공중보건 담당자도, 정부도, 담당의도 아닌 그들의 부모라는 전제이다. 우리는 또한 부모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여 그들이 정보에 근거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다.
저자는 무조건적으로 백신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 백신 스케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백신에 포함된 독성물질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나는 이 책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조금 더 상세한 확인을 위해 구글링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안아키(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와 안예모(안전한 예방접종을 위한 모임)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됐다. 안아키라는 그룹은 수두 파티나 따뜻한 물로 화상치료를 해야 한다는 등의 논란이 될 만한 주장들을 했고, 기사와 뉴스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에게 강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안예모는 이런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은 보이지 않았으나 백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는 이유로 동일한 취급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대게 비난하는 이들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내용보다는 상당히 감정적으로 보였고, 심지어는 상대에 대한 강한 미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백신 거부에 대해 법적인 제재를 마련해달라 올렸고, 백신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이는 사람들을 아동학대범이라고 보는 듯했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왠지 모를 슬픔이 마음을 가득 채우며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 부부는 많은 시간 아이를 위해 고민하고 진심으로 아이의 건강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공신력 있는 저자가 과학적 근거와 함께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쓴 글과 구글링을 통해 어느 정도 사실을 확인하며 현 백신 스케줄에 대해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아동학대범 이라니, 물론 나는 안아키를 잘 모르고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저들이 미워하고 비난하는 대상자가 단순히 특정 그룹이 아니라 우리 부부와 같이 진심 어린 마음으로 아이를 생각하고 책임을 다하려는 모든 부모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슬픔은 현실에서도 이어졌다. 아이를 데리고 예방접종 상담을 받기 위해 동네 소아과에 방문했다. 의사 선생님이 왜 일부 백신을 맞추지 않으려고 하는지 물으셔서 대답하고 있는데 중간에 말이 끊어지고 의사 선생님께서 설명을 시작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논리적인 접근이 아니라는 의문이 드는 것이 있어 그에 대해 설명하고 질문하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끝까지 들어주시지 않았다.
네이버를 보고 와서 소아과 전문의인 자신의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명한 소아과 전문의의 자료를 보았다고 말씀드렸지만 또다시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더 의문점에 대한 대화를 시도하려고 하자, 백신을 모두 맞지 않겠다면 병원에서 보건소에 신고하여 역학조사가 나올 수도 있다고 협박처럼 들리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일부 접종을 하지 않겠다면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요즘 이러면 아동학대라는 말이 나온다고 했다.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정 짓고 저희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과 더 상세하게 상담을 해보고 부모로서 책임을 가지고 결정하고 싶은데 그래도 싫으신 것이냐고 물었는데, 자신은 할 말을 다 했으니 집에 가서 고민해보고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이틀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상상 속 막무가내 백신 거부 주의자에게 쏘아 올린 미움이 내 마음 안에 분노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저 의문점을 풀기 위해 전문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뿐이었는데 병원에서 쫓겨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느 자연주의 출산 카페에서 예방접종 이후 아이를 잃은 한 부모가 자신이 예방접종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전문가만큼 지식을 획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전문가들이 그 전에는 말해주지 않았던 정보를 비전문가인 자신에게 쉽고 따뜻하게 알려준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글이 생각이 났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백신 안전 플랜의 저자 폴 토마스와 같이 비전문가인 부모에게 쉽고 따뜻하게 정보를 전달해주고 판단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신뢰할 것인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말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면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하는 의사의 말을 신뢰할 것인지, 너무나도 뻔한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