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추운 날

추억을 먹고 자라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by 장서율

지난 일요일에는 아무런 약속이 없었다. 황송하게도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일어나서 해독 주스 한 잔을 만들어 먹고는, 요가를 하고 들어오는 길에, 오랜만에 어린 시절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한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날 자느라 늦은 오후까지 듣지 못했던, 일본 탑 여배우 타케우치 유코의 자살(추정) 소식이었다. 일본 드라마를 즐겨봤던 우리 세대에게는, 꽤 많은 히트작과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였다. 지금은 아이 엄마가 되어 같이 나이 들어가는 우리들의 대화 주제는, 그녀가 왜 그 예쁜 얼굴에, 많은 돈에, 어린 아기를 두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그 속은 간 사람만 알지 남겨진 사람은 몰라. 그냥 우리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자'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 마음속은 알지 못할 우울감에 일렁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으로 소면을 삶아 헹구다가 바닥에 다 엎어버리고, 이래저래 꽤나 힘 빠지는 날이었다. 조용히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베르테르 효과인가. 정신적으로 충만하고 건강하다는 건 뭘까. 그냥 매일의 루틴 (routine)을 무리 없이 이어가면서 주변과 나 자신이 잘 있음에 감사하는 그 정도로 괜찮을까.


그 열대의 밤은 더웠다. 에어컨의 온도를 낮추고 또 낮춰도 얼굴에 송송 땀이 솟아올랐다. 꼭 온몸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서 잠을 청해봐도 많이 잔만큼 쉬이 잠은 오지 않는다. 추운 겨울로 시작되는 영화를 한 편 떠올려 본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혼자 외로워서 자기 안의 바닷속을 헤엄치던 소녀 조제의 이야기.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조제의 샐쭉한 이 표정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종로 근처 모 영화관에서 구입했던 조제 엽서 세트 5매.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다.

‘엄청나게 추운 날이었어’ 라며 읊조리는 젊은 남자의 회상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촤라락 소리를 내며 보이는 몇 장의 필름 사진들. 예쁘장한 여자 아이의 옆모습이, 흐트러진 단발머리가, 겨울의 바다가 보인다. 젊은 남자의 이름은 츠네오. 과거의 연인 ‘조제’를 추억하는 그의 톤은 아주, 담담하다. 겨울 바다를 닮아 있는 물빛이다. 이 영화 개봉 당시에, 지금처럼 그때도 나는 감정에 무척 솔직한 사람이었다. 물건, 음식은 물론, 좋아하는 사람은 한 없이 좋아하고, 싫은 사람은 두 번 다시 안 보는, 그런 외골수에 가까운 면이 있었다. 이 영화의 감성에 취해 한 달 만에 또 세 번을 보았다. 시간이 많은 대학생이라 일본에서 온 영화감독과의 대담에도 찾아가서 막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이누도 잇신 감독이 내 질문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질문은 기억이 안 나는데 대답은 기억한다. ‘사랑의 처음과 끝을 잘 그리고 싶었다. 지난 사랑을 추억하는 예를 다하고 싶었다’였다.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사랑에 관한 영화, 소설, 시, 연극, 노래, 등은 사랑을 표현함에 있어 그 과정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처음과 끝은 모두 다르지만 그 과정은 다 비슷하다고 해서. 영화의 초입부에서 대학생 '츠네오'는 동네 괴담을 듣는다. 동네의 한 늙은 할머니가 끄는 큰 유모차에 많은 돈을 싣고 다닌다는 소문이다. 그때까지 츠네오는 그냥 그런 딱 보통의 대학생 남자였다. 연애도 쉽게 하고, 적당히 미래를 걱정하고, 친구들과 마작도 하는 그런 남자. 어느 날 그 할머니의 유모차를 궁금증에 따라가던 그는, 놀랍게도 비탈에서 굴러 떨어진 그 유모차 커버를 젖히자 앳된 얼굴의 여자애가 식칼을 들고 위협한다. 그녀는 돈이나 보물이 아니라, 할머니의 하나뿐인 손녀 ‘쿠미코’였다. 그 일행을 무사히 집까지 바래다준 츠네오는 할머니가 밥 먹고 가라는 소리에 마뜩잖지만 자리에 앉아 자취생 신분으로는 오랜만에 ‘집밥’ 맛을 보고 만다. 그리고 알게 된다. 쿠미코가 불편한 다리로 온 집안을 쓸고 다니며, 가스레인지 옆에 놓인 의자에 기어올랐다가 쿵 소리를 내고 바닥에 다시 떨어지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이후에도 종종 그 밥 맛을 못 잊은 츠네오는 자신의 고향에서 보내준 장아찌를 들고 찾아와서 말한다.


‘밥은 좀 넉넉히 해 주라’. 영화를 보던 나는 현미 군이 생각나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20200928_195305.jpg 츠마부키 사토시는 능글맞고 현실적인 대학생 역에 안성맞춤이다.


츠네오가 밥을 먹다 발견한 쿠미코는 자신 만의 세계에 꼭 틀어박혀 독서를 하고 있다. 그녀가 읽는 책은 프랑소아즈 사강의 ‘일 년 후’라는 소설로 그 여주인공 ‘조제’에 빙의된 듯 가발을 쓰고 목걸이를 둘렀다. 늘 버려진 책만 주워 읽는다는 그녀가 안쓰러워 고서점에서 ‘일 년 후’의 후속 격인 소설책을 구해다 주는가 하면, 지방자치 단체의 예산을 수소문해 그녀의 집을 사용하기 편리하게끔 수리도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쿠미코는 세상이 낯설어 옷장 안에 숨어 책만 읽고, 츠네오는 그런 그녀가 안쓰럽다. 이 와중에 할머니는 말한다. 남보다 못한 신체 부자유자가 남들 바라는 걸 다 가지려고 하면 결국에는 불행해진다고. 또 영화의 복선은 쿠미코가 읽는 책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일 년 후’라는 소설의 후속 작품은 ‘신기한(멋진) 구름’이라는 소설이다. 프랑소아즈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 이제야 슬픔에 눈뜬다는 뜻)’ 의 작가 아니던가. 이윽고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의 죽음을 겪은 쿠미코가, 츠네오에게 어설프게 옆에 있을 거면 차라리 떠나라는 말을 하는 장면에서 둘의 관계가 정립된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현실에 충실하며, 사랑은 시작된다.

열심히 사강의 책에 빠져있는 조제. 허구의 세계 속 주인공 마냥 가발을 쓴 그녀가 흥미롭다.


영화에서 말하는 ‘호랑이’는 동물원에 가본 적이 없는 그녀가 꼭 보고 싶어 하는 동물이었다. 츠네오는 기꺼이 그녀를 유모차에 싣고 데려간다. 이것이 그들 사랑의 클라이맥스 같다. 그리고 다리가 불편하여 한번도 바다에 가본 적이 없는 그녀는 ‘물고기들’이 가득한 수족관에도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둘의 사이가 깊어지고 함께하는 나날이 길어질 즈음, 쿠미코는 수심이 늘었다. 그녀의 동네 친구는 츠네오랑 그만큼 살았으면 결혼하라고 하고, 츠네오를 짝사랑하는 대학 동창 카나에는 그녀를 질투한 나머지 차라리 자기도 다리를 절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갈등 속에, 츠네오는 그녀를 데리고 원래 행선지였던 자신의 고향이 아닌, 바다 여행길에 오른다. 영화 초입에 등장한 사진들이 찍힌 곳들이다. 이 여행의 끝은 어떤 겨울일까. 어떤 추억이 남을까. 사랑해서 상처 받은 게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았다고 누가 그랬나.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의 마지막 쿠미코의 표정이 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카나에 역 우에노 주리보다, 훨씬 돋보였던 조제/쿠미코 역 배우 이케와키 치즈루. 당차고 매력적인 눈빛의‘조제’를 보고 나면 기억 저 편 아련한 사랑의 기억이, 이별에 대처했던 모습이, 성장통이 생각난다. 어느새 또 겨울이 다가오고, 올해는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내 마음은 어디쯤 왔을까. 이별을 먹고 자란 내 마음은 지난 인연들은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만큼 단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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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만으로 살기에는 우리 모두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이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기 싫은 사랑한 기억들. 2004년도산 이 영화는 2021년 1월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세월 한 번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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