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인종차별 때문에 크리스마스 인사를 ‘happy holidays’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 추석, 크리스마스, 생일, 혼자 사는 사람들은 으레 이 날을 어떻게 외롭지 않게 보낼까 고민할 거다. 새로운 사랑도 하고 싶고 아픈 이별도 잊고 싶고. 왜 나는 지난 관계에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나 하는 자책도 하면서, 왜 내 곁에는 좋은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까 불평도 하면서. 그렇게 보낸 수많은 ‘연인 없는 ‘크리스마스는 늘 내게 아쉬움과 회한이었다. 사랑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면 어느새 상대는 떠나버리고 없다. 똑같은 크기와 표현 방식은 아니더라도 손뼉을 치면 맞닿아 쳐주는 손이 있어야 하는 거다. 그냥 그 시간 거기에서 함께 흐르는 두 마음을 즐기면 되고, 서로 할 말 하면서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되는 건데 나는 그러지 못한 거다.
요즘은 밥때가 되면 사람 소리 듣고 싶어서 영화나 드라마를 켜 둔다. 나름 뭘 틀어놔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엄격한 편인데, 한 가지 나 자신과의 암묵적인 룰은 ‘너무 즐거워 보이는 건 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저녁 시간에는, 화기애애한 가족드라마는 나를 우울하게 만들 수도 있고, 향수병에 걸리게 할 수도 있으니 패스. 호러를 좋아하는 나지만 피가 낭자한 저녁 식탁은 별로이니 또 패스. 너무 사랑 타령하는 영화나 드라마도 패스. 오글거리지만 한 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니 밤에 잠이 안 올 수도 있다. 그렇게 거르다 보면 보게 되는 건 PG 13, 혹은 예전에 재미있게 본 것, 혹은, 반전 스릴러물? 슬프고 미련해서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아무리 Post Covid 19 시대라지만 아직 젊은 너는 왜 이러고 산다니?’
여행을 갈 수 없어 너무 무료하다. 가끔은 일탈도 해 보고 길도 떠나봐야 내가 모르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길에서 만나는 내가 가끔은 너무나 새로워서 충동적으로 이방인과 사랑에 빠지기도 해 보지만, 그 기억들이 일상으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나쁜 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틀에 박혀 나는 이래야만 해, 라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보다는, (영화 속 아만다처럼. 그녀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혼자 떠난 크리스마스 휴일에, 너무나 끌려 하룻밤 함께 한 그라함에게 키스하며 같이 자자고 한다. 그러면서 계속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한다. ‘나는 사실 이런 사람 아니야,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돼…’ 아, 안타까운 데자뷔. 이미 아만다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고 둘을 보는 관객들은 행복하다. 그라함 역을 맡은 주드로는 유모와의 불륜 뉴스 나기 전에 찍은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면에서는 너무 상큼하다. ) 자신 있게 혼밥 혼술 할 줄 알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관광 명소를 물어 같이 또 따로 찾아갈 줄 아는 내가 낫더라. 평소에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살았던 내가, 우연한 행운으로 업그레이드된 비행기에서 ‘찬 물 드릴까요?’라고 묻는 스튜어디스에게, ‘찬 물 뜨거운 물 반반씩 섞어주세요’라고 취향껏 말할 줄 아는 모습은 평소에는 어디에 숨어있었던 건지? (이것도 갑질이라고 하실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약 15년 전의 일로 추정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서 안절부절 살던 나는 여행의 시작 순간에 이미 허물을 벗고 없었다.
그런 해방감이 좋아서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들 가운데 꽤나 인연이 되었던 경우들이 있었다. 좋은 사람도, 미심쩍은 사람도, 영 아니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다. 대학 시절 나의 일탈은 나이트클럽이나 락카페 출입이 아니었다. 나는 좋아하는 공연을 보러 자주 비행기에 올라 가까운 나라로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만큼 한 외국 아티스트가 좋았다. 그래서 대학교 다닐 때 한 달 평균 4개의 알바를 하고,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일하느라 연애 따위는 할 틈도 체력도 흥미도 없었다. 장학금도 타야 여행비에 보탤 수 있으니 공강 시간에도 혼자 틀어박히던 아지트가 학교 도처에 존재했던,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였다. 과모임에는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어서 모두와 친하지만 누구 하나와 특별히 친하지 않은. 그런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사회 친화적 인간형. 그냥 그건 내 유년시절부터 누가 꾸준히 내 피 속에 집어넣은 점액 마냥 꾸덕꾸덕 내 안에서 자란 지긋지긋한 틀일 뿐이라는 걸, 먼 길 떠나는 걸 반복하다 지쳐서 외국에 자리 잡은 이제는 안다. 나는 계속 거기에 있다가는 틀 속에 짓눌려서 이스트 한 숟가락만 더 넣으면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빵 반죽처럼 계속 분노 속 ‘발효 중’이었던 것 같다. 대학교 4년 동안 나는 스무 번이 넘는 여행을 떠났고, 개중에는 한 학기 휴학하고 어학연수차 눌러앉았던 적도 있다. 물론, 돌아와서는 카드 빚 청산에 쉴 틈 없이 일했던 기억도 나지만, 일하면서 얻어진 기술도 있으니, 생각해 보면 나름 유익하게 잘 지나간 ‘오춘기’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내 안에 아직 다 깨어나지 않은 자아의 몸부림에 괴로워할 무렵, 아마 이십 대 초반, 비행기 안에서 만난 그 사람은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연세가 나보다 많으신 한국인 아저씨(?!) 들에게 묻고 싶다. 젊은 여자가 혼자 오후에 스테이크 파는 식당에 와서 책 읽으며 밥 먹는 게 뭐 그렇게 신기한 일이냐고. 나는 내 시간과 돈을 들여 온전히 미각과 감각을 채우고 있는 중이라고, 방해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늘 그러지 못했다. 비행기를 탔을 때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나는 일단 길을 떠나면 약간, 남이 내가 뭘 하든지 간에 신경을 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의 방랑자 모드였으니까. 검은 체크 남방에 어두운 색깔의 테 안경을 낀 나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색 옷을 입은 그 사람은 처음부터 부조화였다. 아마 나는 비행기 안에서 십자수를 하고 있었을 거다. 그는 현지인, 나는 여행자. 숙소를 찾아가는 내 모습이 좀 허술해 보였는지 지하철 몇 정거장을 같이 타고 와서 호텔에 굳이 바래다준다. 나는 그날 저녁 봐야 할 공연이 있었고 다음날 늦은 점심 즈음 만나기로 한다. 아니다. 기억이란 이상해서 그날 비행기에서 내려 나에게 바로 점심을 사주었나 헷갈린다.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엔 호텔 프론트에서 연락이 왔다. 누가 도넛을 잔뜩 사갖고 와서 맡겨놨다고. 신기했다. 왜 나를 좋아하지? 그냥 나는 아무 생각이 없는, 자기감정 과잉에 사로잡힌 철부지였다고 해 두자. 그냥 난 그때 정신 연령이 딱 고등학생 같아서 남이 뭐 사주면 ‘헤헤헤’ 웃던 그런 애였던 걸로. 우린 서로 휴대폰 번호가 아니라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역시나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지만, 그 해 남은 수개월을 참 많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완벽한 타인인 우리는 참 많은 속 얘기를 꺼내놓았다. 그때는 벚꽃 피기 전 초봄이었다.
나는 여름에도 같은 곳에 같은 사람의 공연을 보러 갔고, 그를 만났다. 가을에는 그 나라의 다른 도시로 ‘덕질이 목표인’ 어학연수를 갔다. 그는 굳이 일거리를 만들어 나를 보러 내가 사는 도시까지 두 번이나 출장을 왔다. 같이 별로 한 건 없다. 밥 먹고, 강가를 걷고, 아,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노래방에 간 적은 있다. 악을 쓰며 내지르고 내지르는 나를 보면서 그는 혀를 끌끌 찼다. 헤어질 때 그에게 샤넬 no. 5 향수를 선물로 받았다. 남자에게 받은 첫 향수였다. 나는 겨울 즈음이 되면 헤어질 때의 강바람을 생각하며 그걸 뿌리곤 했다. 그는 나에게 바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없었다. 아니,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부정했다. 그도 나도 자기 세상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것들에 치여서 외롭고 외로운, 그러나 책임감만 무척 강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일탈은 일탈로만 끝나야 할 걸 나는 알았다. 마지막 헤어질 때 교환한 휴대폰 번호로 내가 집에 귀국해 전화기를 켤 때까지 그는 계속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꺼진 핸드폰을 켜자마자 울리는 벨소리. 두 번 만에 받자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 ‘… 괜찮아요?’ … 왜 내 인생에는 이런 사람이 없을까 싶었는데. 완벽한 그는 왜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 만나게 되는지. 그는 주변 환경을 포기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나도 내 틀을 벗어날 용기는 없는 겁쟁이였던지라, 그의 이메일의 강도와 용량이 커질수록 나는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리 그가 나를 잊었기를 바랐다. 나는 이제 그때 그의 나이를 지나 어른 비슷한 사람이 되었으니, 잊을 법도 한데, 그의 웃는 얼굴이 지금도 기억은 난다. 인간의 사정이란 개개인이 모두 복잡한 거지만 그냥 그렇게 좋은 추억으로 남은 여행지에서의 다소 긴, ‘만남’으로 해 두자.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여행지에서 만난 정말 마음에 드는 그 사람이 애 둘 있는 상처한 남자라는 걸 처음에는 어려워서 말 못 하고 나를 만난다고 해도, 그 사람 됨됨이만 괜찮다면야 하는 나이가 되었어도, 서양이든 동양이든 사람들이 오래도록 나 자신인 줄 알고 지켜온 나 자신의 사고방식을 깨기란 정말 어렵구나. 아침잠이 많아 평소에 10분 일찍 일어나기조차 너무 힘든데, 하물며 30여 년 살아온 나의 방식과 의사소통을 바꾸기란 얼마나 힘이 들까? 어른들 말씀에도 있지 않은가.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진짜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닌 타인을 아무리 고치고 자기 틀에 넣으려고 해 봐라. 망가지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그런데 스스로 변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더라’라는 말은 없어져야 한다. 변화만이 한 인간이 발전하는 길이라고 이제는 믿기 때문이다. 진짜 나 자신을 지키며 사는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며 사는 일 같다.
그렇게 용기를 내고 떠난 자에게 계기는 찾아온다. 미국인 아만다는 영국인 아이리스의 집으로, 아이리스는 아만다의 집으로, 둘 다 자신의 지난 사랑이 끝난 직후 처음 혼자 맞는 크리스마스를 전혀 자신이 아닌 곳에 물리적으로 자신들을 옮겨놓는다. 잠시지만 새로운 일상, 새로운 이웃, 새로운 연인을 만나며, 자신들의 지난 관계 속에서 아만다와 아이리스는 상대를 너무 사랑한다고 믿은 나머지 자기 진짜 모습을 잊고 있던 걸 발견한다. 자신을 이용하고 양다리도 모자라 저울질하던 끝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발표한 재스퍼에게 그래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네며 ‘Why are you so nice?’라는 말을 듣는 아이리스. 살면서 정말 쓸데없이 착한 아이 코스프레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준비한 선물을 내던져도 아쉬운 개망나니 바람둥이에게, ‘그래도 나는 너를 온 마음 다해 사랑했어’는, 그 순백의 순정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아이리스는 아만다의 이웃인 90세의 아서를 만나며 그에게 아쿠아로빅으로 다시 기구 없이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반대로 할리우드에서 무려 60년간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에게 주옥같은 고전영화들을 소개받는다. 주변에는 영화 음악을 제작하는 재간둥이 마일즈도 있어 외롭지 않다. 아서는 아이리스에게 묻는다. ‘너처럼 예쁜 아가씨가, 왜 크리스마스 가까운 토요일 저녁에 나같이 늙은 사람과 저녁을 먹나. 아가씨는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해, 결코 주인공 친구 타입이 아니야.’ 당당해지라는 말을 멋지게 돌려 말씀하시는 아서의 지혜가 빛난다. 마일즈도 매한가지다. 자신에게 과분하다 말하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사귀지만 그녀는 늘 바람을 피우고 다시 마일즈에게 돌아와 자신이 잘못했다고 받아달라고 빈다. 연인에게 마음대로 휘둘리는 마일즈를 보는 아이리스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며 그를 위로한다. 마일즈는 사람 자체로 솔직하고 멋지지만 연인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자신이 이런 모습을 알리 만무하다. 클라이맥스는 이제 좀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는 아이리스에게 찾아와서, 자기 자신이 선물인양 ‘Surprise’를 외치며 그녀와 무드를 잡는 전 남자 친구 재스퍼.
‘Things are complicated about me’라고 자기 인생 정의하며 상대 여자에게 이해를 구하는 남자는 바로 밀어내는 게 최선이다. 그 말인즉슨, ‘나는 원래 여자가 있는데 지금 이 순간 네가 너무 갖고 싶어’라는 말을 멋들어지게 축약한 셈이거든. 유희가 사랑의 목적인 카사노바들은 상처 받기 쉬운 여자들만 골라서 점령하고 떠난다. 무너진 삶이나 자존감에 대해서는 일말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을 테지만, 그들이 평생 모르는 한 가지가 있다. 여자들은 강하다. 존재 하나하나 자체가 아름다운 꽃이다. 빨리 필수도 늦게 필수도, 또 여러 번 피고 질 수도 있겠지만, 사랑받아 마땅할 꽃인 건 누구든 변함이 없다. 이 순간 아이리스는 정말 어려운 (그리고 영화 속 3년 간 그녀의 짓밟힌 자존감으로 너무 힘들었을) ‘이건 아닌 거 같아’에 이은 사이다 대사들을 날린다. 아, 영화지만 속이 뻥 뚫린다. 아이리스처럼 고귀한 이름의 신문사 직원을 연기하는 배우가 케이트 윈슬렛인 것도 너무 마음에 든다.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좋아하지만 사실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성공한 차도녀, 미워할 수 없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만다를 연기한 건 카메론 디아즈다. 너무 예뻐 빛이 나지만 역시나 자존감이 너무 낮은 그녀를 연기하는 걸 보기가 아프다. 상처 받을 자신의 마음이 보여서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난 떠나야 하니까’ ‘우린 너무 다르고 미래가 없으니까’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한다. 상대가 어렵게 했을 사랑 고백을 듣고도, 자신의 마음이 동하고도 모르는 게, 우매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들이 눈에 보여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마음대로 사랑하지도 못하는 어른은 참 재미없고 무력한 존재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열다섯 살 이후 처음 그녀의 눈에 눈물 나게 한 남자 그라함에게 안기려고, 십 리도 못 간 택시에서 내려 구두를 신고 눈밭을 내리 달린다. 마치 오랫동안 자신의 진짜 얼굴을, 솔직한 눈물을 마주 대하려고 애타게 기다렸던 소녀처럼. 기쁘게 달려온다.
사람들의 마음이 들뜨는 holiday 시즌에는 조금의 일탈이 생길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선물과 약간의 술과 달달한 것들은 분위기를 띄워주기에 좋다. 웃고 떠들고 마시고 사랑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상대도 시간도 공간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기에. 점점 더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설 시간들이 사라져 가고 있기에. 진짜 괜찮은 사람 있으면 닥치고 사랑부터 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같이 헤쳐나가도 인생 나쁠 거 하나 없는 것 같더라. 어차피 나는, 10년 전에 했던 고민, 지금 또 하고 있고, 20년 전에 좋아했던 것들, 지금 복고와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 좋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 짧다. 섬광 같고, 덧없다. 하지만 누군가와 진심으로 마음이 통했던 기억은, 아무리 시간이 가도 그때 그 모습 그 향기로 남는다. 상처가 깊어도 종내 인간은, 자기가 좋았던 기억만 가지고 살기 나름이니까. 추억은 아름답고 향기롭다. 그런 감성 근육이라도 있어야, 힘든 이 세상 버티지 않겠나 싶다. 자, 영화 다 보셨으면 이불속을 헤엄치지 마시고, 운동복입고 조깅이라도 나가보시라. 크리스마스는 아니어도 잘 생긴 골든 레트리버 한 마리랑 산책 나온, 근육질의 이웃집 남자와 인사라도 나누게 될지 누가 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