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그 '하정우'의 추격자
"야... 4885, 너지."
꿈에 나올까 두려운 그 말투, 눈빛.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외나무다리에서 조우하는 형사 중호 (김윤석 분)과 연쇄살인마 영민 (하정우 분)의 추격씬과 싸움씬이 '허벌나게' 많은 영화 '추격자 (2008)'. 하정우라는 배우를 잘 모를 때부터 영화 포스터만 보고 당시의 남자 친구에게 계속 보러 가자고 졸랐던 영화였다. 생각보다 많은 남자들이 공포물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호러물의 시작을 알린 가위 (2000), 폰 (2002) 같은 것도 혼자 영화관에 가서 보고, 그 무섭다던 최초 극장판 주온 (2002) 도 용감하게 새벽녘 집에서 혼자 보던 나였으니, 연쇄살인마의 이야기가 실화인 영화를 보러 가자 하니 왠지 '뜻뜨미지근한' 남자 친구의 반응이 참으로 별로였다. 그래도 그는 함께 해 주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미혼모인 미진 (서영희 분) 이 생계를 위해 출장 콜을 뛴다는 걸 보니 마음이 참 그랬다. 그녀의 포주는 아픈 날에도 그녀를 일터로 내몬다. 영민은 이미 여러 명의 여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집으로 불러 처리한 뒤였다. 창문을 열면 바로 벽인 화장실에 갇혀서 머리를 가격 당한 채로도 '아이가 있어요, 살려주세요..'를 반복하는 미진. 유일하게 영민의 악행을 눈치챈 형사 중호만이 최근의 납치자 미진이 살아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를 추격한다. 그 비좁은 골목에서 두 남자는 땀에 절도록 뛰고 또 뛴다. 나홍진 감독이 후에 영화 '곡성' (2016; 이 영화도 추격자도 영화관에서 세 번 봤다. 너무 좋아해서. )에서 보여준 놀라운 편집 능력을 봤을 때, 영화 '추격자'에서도 원하는 편집본을 만드려고 영민과 중호를 뛰고 또 뛰게 했을 것이다. 미진의 남겨진 어린아이를 위해서 엄청나게 영민을 잡고 싶었던 그 남자 중호의 대사, '야 4885 너지?'는 지금도 패러디와 퀴즈 쇼에 자주 등장하는 명대사일 것이다.
영화에서 내가 느낀 쾌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직업여성이 처한 현실과 생활고를 안타깝게 바라봤고, '끝까지' 그녀가 살아있을 거라 믿으며 쫓아 주었다, 적어도 전직 형사 중호만큼은. 그리고 말 그대로 추격씬이 생동감 넘쳤다. 그러나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상투적인 결말은, 지금 생각해도 그렇지만, 개미 슈퍼 앞에서 중호와 함께 한 형사들이 미진의 죽음 앞에 어이없어하며 주변 사람들과 엉기는 장면에서 끝났으면 차라리 훨씬 더 나았을 텐데 싶다. 굳이 중호와 영민의 지루한 마지막 싸움까지 보여주지 않았어도, 관객에게는 슈퍼에서 미진이 사망함으로써 받아들여지는 안타까움과 경종이 더 크지 않았을까 싶어서. 영화 속 지옥의 문턱에서 도망친 미진은 속옷 바람으로 가까운 슈퍼에 달려가 도움을 청하지만, 담배를 사러 들어온 영민에게 슈퍼 아줌마는 오지랖과 두려움으로 말미암은 대사를 날린다. '저기 안에 아가씨도 도망쳐서 방에 숨어 있잖아' 이제는 주변 사람에게 쉽게 도움을 요청하기조차 힘든 세상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나 구급차를 부를 생각은 아주머니께서 전혀 못하셨을까. 이 답답한 세상과 안타까운 죽음들이여. 현실에서의 살인마는 잡혔으니 다행이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 인도 달리트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964201.html)에서의 성폭행 살인 사건을 보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심리적 이유로 발기부전에 사이코 패스 역을 실감 나게 연기한 하정우가 좋아서, 영화가 대부분의 현실과 달리 사이다인 게 마음에 들어서, 그때의 남자 친구랑 보고 나서도 두 번을 친구들과 더 봤다.
나중에 그 남자 친구에게 들었다. 폭력적인 건 무조건 싫어하는 그는 아버지에게 많이 맞고 자라서 폭력물이나 공포물이 싫다고 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출중해서 늘 비교받고 자랐다고 했다. 그리고 늘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자기가 대여섯 살 무렵에 일본에 가서 박사 공부를 하셨다는 어머니 때문에,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고 싶어 하는 나를 늘 못마땅해했다. 좋아하는 마음을 의심한 건 아니다. 오랫동안 그와 학창 시절을 티격태격하며 함께 보냈다. 그러나 그는 늘 나를 자기 세상에 있는 새장 속에 잡아 가두려고 했었다. 집에 있는 내 방 벽지에 그려진 '새장 속에 갇힌 새' 그림만 봐도 너무 싫었던 나인데 (엄마는 그 벽지가 여성스러워서 고르셨다고 하셨다),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사람, 내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사람. 폭력과 비폭력은 행동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고 서로의 말에서도 나온다. 살인은 물리적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내가 가장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그는 나를 외면했고, 그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나는 그를 버렸다. 때로는 만나서 득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사람과 나는 만나서 점점 서로의 실이 더 컸다.
하지만 그와의 경험은 최초로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싫어도 잘 거절하지 못했던 나는 그에게 널 떠올리면 괴로우니 연락하지 말라고 하며 연락을 끊었다. 요즘의 나는 과거의 경험을 자꾸 떠올려 과거의 나와 만나고자 한다. 그때 미처 풀지 못했던, 마음의 응어리와 어린 내 모습을 하나씩 보내주려는 양 말이다. 내게 진실되지 않았던 그에 대해, 정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놓아버리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울면서 그의 집 앞에 찾아가 쭈그리고 기다렸던 적도 있고, 한 밤중에 쳐들어가서 식겁하게 했던 적도 있다. 추격자처럼 저돌적이고 맹목적인 나의 사랑은 주변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외골수처럼 직진만 했었다. 스스로 한계에 다다라서 마음이 너덜너덜 해 졌을 무렵에 누가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무리 좋아도 나를 힘들게 하는 걸 끊어낼 수 있는 마음의 다이아몬드가 있어야 한다고, 그걸 갈고닦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게 불교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 (金剛經 : 불교 지혜의 정체(正諦)를 금강의 견실함에 비유하여 해설한 불경으로 우리나라 조계종의 기본 경전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이라고 했다. 평생 너를 힘들게 할 사람 같으면 너의 손발을 잘라버리는 한이 있어도 헤어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말을 따르길 백 번 잘했다고 생각한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는 평생을 믿고 맡길 수 없다. '아무리'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도.
최근에 '곽정은의 사(思) 생활 (https://www.youtube.com/watch?v=NcQNb1fnJDg) '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즐겨 보는데, 거기서 칼럼니스트/ 작가인 '곽정은 씨가 유흥업소에 자주 출입하는 남자 친구를 만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던 적이 있다. 한 번이라도 돈으로 누군가의 몸을 '막 대할' 권리를 사 본 사람이라면, 그걸 쉬이 잊을 수 없어 반복하게 될 확률도 높거니와, 여자 친구로서 내가 존중받을 확률이 낮다고 해석되는, 그런 이유로. 영화 속의 영민도 자기 안의 지질한 '자아'를 숨기고자 약자인 여자 위에서 군림했다. 고문하고 잔인하게 살해했다. 내 전 남자 친구는 나를 사랑한다고는 하면서도 내 몸과 성격을 존중하지 않는 행위로써 여러 번 나를 비참하게 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해서 같은 시험을 보더라도 시험 일정이 달라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는 나에게, 자기는 시험 끝났다며 술 한잔 하자고 톡 하는 남자. 자기가 게임할 때는 만날 약속을 해도 사람을 마냥 기다리게 하는 남자. 지금 생각해보니 한 마디로 최악이었다. 세상에 가엾다고 동정심 가는 사람 만나봤자 돌아오는 게 이건가 싶어 씁쓸하지만, 어렸고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내 아름다운 청춘을 나눈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큰 상처가 낸 게 미안하다.
우리 사회에 가급적이면 사람들의 외면에 삐뚤어진 '영민'도, 생활고 때문에 위험에 내몰리는 '미진'도 없었으면 좋겠다. 끝까지 악인을 추격해주는 '중호'는 있었으면 좋겠다. 피해자가 살아있다고 믿으면서 수사하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더 크다고 하는 이야기를 어떤 TV프로에서 들은 적이 있다. 범죄는 언제 어디서든 내게도 주변인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 영화는 허구 같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저러나 이 영화 찍고 나서 '미진' 역의 서영희는 2010년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라는 끔찍한 영화의 주인공을 맡게 된다.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한 동안 다른 역할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역경을 이겨내는 아이콘이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아프지는 말고.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는 영화 또한,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영화 중에 하나다. 그 이유는 내일마저 적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