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어야 해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정을 아는가.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그녀와 관계되어 있는 것이면 한 없이 기뻐서, 세상의 모든 것이 그/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고, 내가 하는 사랑이 마치 운명인 것만 같아서 마냥 들뜨는 그 밝은 웃음. 그 당사자가 나일 경우, 거의 100프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는지 자각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닐 거야 부정해 봐도, 내가 사랑에 빠진 걸 부인할 수 없는 순간. 그 찰나의 내 눈빛과 웃음. 그게 사랑이다. 더 이상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사랑을 시작할 때도 그랬다. 스르르 다가온 것이지 처음부터 나를 지배하려 온 것이 아닌 그 절대자 '사랑' 이란 그 이름. 시작은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교회나 절에서 연인을 만나 본 적 있는 사람은 알 것 같다. 내가 종교에 대해 가지는 신앙심이 클수록, 그 절대자가 보내준 사람이라고 믿게 되는 걸. 낸시랭의 사연을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한 것은 그녀의 바보같이 순수한 그 마음이 꼭 나 같아서였다. 그와 관련된 진실은 어째도 상관없었다. 배경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실을 원했으니까. 그렇게 여럿이서 어울리던 어느 나날 가운데, 그는 내가 일하던 곳까지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비려서 자기는 못 먹는다던 석화랑 내가 좋아하던 샴페인을 사주면서, 야근이 많은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가벼운 내기를 걸게 되었다. 밑도 끝도 없이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는 영화의 제목 맞추기를 내기로 걸었다. 어차피 썸 타는 남녀는 어떤 구실로든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 마련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성의 이름을 제대로 맞추는 사람에게 술을 사주기로 한 것이 우리의 내기였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린 네이버/구글링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이 영화의 제목을 기억해 내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몰래, 검색을 했다. 이미 마음은 그를 향하고 있었던 거다. 그 사실을 숨기고 그에게 굴과 샴페인 약속을 받아낸 걸 나는 지금 후회한다. 뭐든 억지인 건 좋지 않다. 내 것이 아닌 인연을 억지로 만들어 버리면 벌을 받고 끝나리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운명이 파놓은 덫에 걸린 것처럼, 나를 찾아온 그와 사랑을 했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영화 포스터의 카피는 그랬다. '넌 너무 불친절해...' 복남은 말 그대로 영화의 주인공 서영희 분의 영화 속 이름이다. 도시에서만 곱게 자란 내가 하나 몰랐던 것이 있다. 시골 사람들은 마냥 순박하고 착할 거라는 거. 인심이 좋을 거라는 거. 아니 틀렸다. 실제로 그런 분들이 더 많으실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겪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좀 더 여유를 가진 내가 베푸려는 것들 가운데 '가장 많이'를 원했다. 대놓고 내게 이득을 바랐다. 꼭 내가 그들의 노예가 된 것처럼, 나를 부렸다. 결혼을 함으로써 그들의 부족에 속하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나의 과거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평생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것처럼. 복남은 섬에서 자랄 때부터 섬 남자들의 성 노리개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같은 반 친구들에게 범해지는 순간부터 영화는 불편했다. 섬에서 나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복남의 친구 해원 (지성원 분)은 휴가를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고 불편하다. 그녀는 복남이 보낸 간절한 편지를 읽지 못한 것이다.
'이끼 (2010) '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 모티프가 있었던 것 같다. 섬에서 살면서 성적으로 학대당하고 구타당하고, 일만 하는 복남에게는 지키고 싶은 딸이 있다. 어느 날 그녀가 '퓨즈가 나가버린 건' 자신에게 관심이 사라져 버린 남편이 밤낚시를 가서 딸을 근친상간해버린 것 같은 의심이 들었던 순간이다. 아무리 내 편이 없이 삶이 나를 고달프게 해도 모성애는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해원에게 한 자 한 자 쓰는 복남의 편지는 무지하고 날 것인 표현들이 많지만 진심만이 있어 너무 아프다. 복남의 복수가 이뤄지는 순간들은 그녀의 아픔을 목도한 다음이기에 그렇게 아프지 않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버텨왔던 아픈 순간들이 있을 뿐. 누가 그것을 단죄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았다면 나는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있었을까.
내 몸과 마음 그 어떤 것 하나도 내 것이 아닌 게 없다. 자유란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내 자유는 그 누구의 희생도 따라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나의 결혼 생활은 그러지 못했다. 나를 받아줄 것처럼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에게 내 미래를 맡긴 결과는 내 자유를 영원히 빼앗는 것이었다. 단 한순간도 내가 '싫어, 아니야'라고 말하는 걸 견디지 못하던 그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했던 나를 복남보다 못하게 했던 게 뭘까. 원래도 나는 싫다는 말을 잘 못하는 아이이긴 했다. 그 자유를 찾아 여기까지 왔더니 나를 아낀다고 말했던 그와 그의 가족들은 나를 움켜쥐고 내게서 돈을 착취해내기 바빴다. 자유를 쫓던 내가 찾은 건 극한의 외로움이었다. 나를 해하려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했다고 말한 그 모든 사람들에게, 제발 나를 밟고 지나가지는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사랑이란 건 그런 말,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켜주려는 노력이라는 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주기만 할 때, 혹은 내 마음을 다 열어 나를 보여줄 때 가능한 일이므로. 내게 여러 가지 재주들이 많다고 해서 그걸 아무나 위해 쓰지는 않는다. 진심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쓰이라고 나오는 게 아니다. 누구에게든 그 정도의 자유는 있다. 나를 소유한 것처럼 던 행동하던 그 사람에게 늘 말하고 싶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물리적이든 언어적이든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당신 밑에서 산산이 부서지라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운 게 아니라고. 나를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달라고. 제발 그런 건 조바심 내지 말고 당신 그저 내게 솔직하기만 하면 된다고. 상처 주지 말라고. 내 마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시키지 않아도 내 가장 좋은 걸 주고야 말 테니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랑에 빠진 당신의 표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먼 곳까지 갈 수 있는지.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깨는 건 죄악이다. 상처 받고 친구 품에 안겨 숨을 거두는 복남이 말한다. 그녀가 평생 하고 싶었을지 모르는 그 한 마디. '넌 너무 불친절해..' 남을 도울 줄 몰라. 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줄 몰라. 사람의 진심을 몰라. 내가 중요한 만큼,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람도 소중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의 깊이와 너비를 안다면, 먼저 사람으로서 나를 받아들여주기를. 나 또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배경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