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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난요가 Dec 31. 2018

죽음은 신이 내린 축복인가

첫눈 내리는 날 할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멀리 타국, 타지에서 달려온 손주들을 기다리셨나 보다. 위독하시다는 연락에 하루를 꼬박 넘기고 도착해서 할아버지를 뵈었다. 할아아버지 가슴에 손을 얹고 흔들며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왔어요!'라 외치는 손녀와 눈을 마주치려 애쓰시는  할아버지. 그 앞에서 울지 않기로 했던 다짐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나는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그렇게 할아버지 곁을 지킬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었다. 할아버지를 뵙고 사흘이 지난날 아침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

온기가 남아 있는 할아버지를 매만지며 믿지 못해 울었고 차가워진 할아버지의 얼굴을 부여잡고 좋은 곳으로 가시라 말하며  울었다. 정신없이 문상객을 받는 도중에도 할아버지가 그리워 울컥울컥 눈물 콧물을 삼켰다. 눈이 많이도 쏟아지던 발인 날 유골함을 들고 가족들과  할아버지의 넋을 따라 시골집을 돌며 또 눈물을 훔쳤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내게 또 다른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어릴 적부터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할아버지의 유난한 손주사랑이 이유이기도 하다.

탈상하던 날, 할아버지의 묘 주변을 새 하얗게 덮은 눈을 한사코 서서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안 보이게 덮으려는 것인지 야속한 삶을 눈부시게 덮으려는 것인지 모를 하얀 눈이었다. 할아버지 물건들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일상을 보내려는데 장례 때 보다 더 실감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언제고 불쑥 나타나 그리움과 회상으로 나를 뒤흔들 것을 안다. 세상의 모든 헤어짐이 그렇고 다시 눈을 마주치고 어루만질 수 없는 가족의 죽음이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곡을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 아내 온 그 역사에 대한 위로이자 존경이며 이 생에서는 다시 볼 수 없음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다. 그 죽음이 정말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인가. 죽음이 가져오는 축복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축복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나 성취의 결과, 사랑의 결실 앞에 말한다. 죽음을 축복이라고 하는 이유 역시 같을 듯하다.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땠나. 좋은 곳으로 가시라 간절히 바랐다. 돌아가시기 두세 달 전까지도 세세한 것들을 물으시며 당부를 하셨던 분이셨다. 이제 마무리한 이승의 삶은 당신 앞에 서 있는 자손들 각자의 몫일뿐이다. 그러니 이제 마음 편히 가시길 간절히 바랐다.


죽음이 축복인 이유는 고통과 고난의 연속인 세속에서의 그 시간들에 마침표를 찍었음이 아닐까.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죽음으로 남은 이들에게 살아갈 이유를 더해 주었고 살아온 시간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무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축복에 시간이 지나면 죽음이 오듯 새로 나타난 생명들을 더하고 싶다. 할아버지의 영정 앞, 묘지 앞에 어린 증손들이 뛰어다닌다. 손끝에 닿고 발로 느끼는 많은 것들이 새로운, 이 어린 생명들은 할아버지가 남기신 축복이다.

할아버지의 묘 앞에 두고 온 증손주의 눈사람


기억합니다. 어린 손주들 무릎에 앉히고 참 좋아하셨던 분.

기억합니다. 의사조차 예상치 못하게 힘든 병상을 털고 다시 일어서신 강하고 강하고 강한 셨던 분.
기억합니다. 당신의 빼곡한 수첩들,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한 서랍장 안.

기억합니다. 제 손편지를 읽고 말없이 눈물을 떨구셨다던 그날.

기억합니다. 타국, 타지에서 보냈던 유학시절 저에게 매일 안부를 물으시고 매일 격려하셨던 나의 할아버지.

기억합니다. 당신 가슴 한편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너무나 뿌듯했던 나를.

기억합니다.  기억합니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나의 또 다른 아버지셨던 분.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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