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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선한량 Oct 13. 2024

나는 왜 그 무언가를 초월하는 사람이고 싶은 걸까?

갈망과 그리움 그리고 달콤 씁쓸한


이 글은 작년 11월 작성했던 글을 24년 10월에 다시 손본 글이다.


차를 타고 아침 출근하는 길이다. 차창 유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온전히 홀로 속하는 것은 묘한 편안함을 준다. 순간 머리에 스치는 단상을 적어 본다. 결정적인 뭔가를 기다리려는 듯 매년 연말에는 호기심과 설렘 그리고 불안감이 교차한다.

'올해 평점이 어떻게 나올까? 전년도 점수를 만회하는 평점을 받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이어지는 인사 발령에는 누가 과장과 소장이 되고 어느 누가 가고 오려나?'  


마치 어떤 결과가 나와도 수용하거나 초월하려는 듯 담담하다. 물론 좋은 평점이 승진에 도움은 되겠지만 그 감흥이란 것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았다.

내장산사무소에서 근무할 때 평점 발표 이후 한 달 동안 말이 없었다고 주변 동료가 말해주기도 했다.

사진: Unsplash의Towfiqu barbhuiya




사실 결과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순간에 내가 무엇을 배우고 남겨질 메시지가 무엇인가가 더 중요했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나를 흔들어 댈 수도 있는 상황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무심한 듯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근무 평점이 좋지 않아 침묵과 무기력으로 며칠을 보낸 적이 있는데도 그런 상황을 고대하는 이 모순된 심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모순된 마음에 들이댈 수 있는 해답 인지는 모르겠다. 가끔 어떤 상황에 나를 밀어보자는 심리도 종종 생긴다. 거기서 반응하는 나의 모습이 어떨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메시지나 의미를 하나라도 건질 게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이 있다. 연말 승진 시기가 되면 누군가는 웃지만, 누군가는 침울해지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나락에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당사자가 된다면 슬플 수도 있지만 절망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온전한 나만의 가치 발견과 성장을 우선순위에 두고 결연히 일어서고 싶다.

가능하다면 궁극적으로 그 무엇을 초월하련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라도 가지고 싶은 걸까?'

'영성'은 인간 삶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이며 진정한 자기 초월을 향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역동성을

통합하려는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실제라고 지식백과는 정의하고 있다.


'방황하는 사람은 특별하다'의 저자 마동혁 작가는 방황하는 사람은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며, 탐험하는 사람이며 자기실현을 넘어 초월하려는 기질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라고 독려한다. 인생의 의미와 궁극적인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 결국 인생의 목적과 소명을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삶을 갈망하고 있다.

삶의 궁극에는 자아 초월의 힘과도 연결되어 있고 그 주변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   


과장님에게서 전해 들은 사무소 근무평점 소식을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와이프에게 말했다. 2년 연속 같은 점수를 받았다. 공단 경력과 능력을 인정받기보다는 소장에게 잘 어필한 사람이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면서 다른 사무소로 전출당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더니 아내는 웃으면서 말한다. "정작 중요한 오빠 얘기보다는 다른 사람 이야기만 하고 있네"


맞다 그랬다. 그 안에 나는 없었다. 나의 일을 남 얘기하듯 말했다 관조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상황이 어떤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해 봤다. 오히려 조금 여유가 있다면 도와줄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제일 아쉬워해야 할 사람이 도대체 누구를 위로하고 있단 말인가?




 '이미 초월한 걸까? 나에겐 더욱 중요한 목적이 있다고 스스로를 이미 설득한 것일까?'


이 문제 또한 관점과 해석의 문제다. 나의 기질과 성향에 맞는 과업을 바라보고 있다. 승진보다는 나의 인생 과업을 실험하고 그 안에서 성장하고 기회가 되면 동류의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운이 좋으면 수익도 가져가는 사업모델을 구상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초월하고 싶고, 보다 높은 목적의식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내 현업은 인생 과업과 연결되는 그 지점에서 나를 실현하는 그 무엇이다.  


나 자신이 재료가 되어서 실험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극적인 기회를 통해서도 부딪쳐보고 싶다.

그래서 어떤 결을 가진 사람인지 바라본다. 여전히 전전긍긍하면서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결국엔 무엇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열망과 그리움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나의 인생 과업의 동력일지 모른다.

실체가 없는 결핍과 갈망 그리고 그리움은

고향이라고 여겨지는 그 무엇이다.

내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다.

본래 온전과 평온을 느끼던 그곳에는 나와 같은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결 과 안테나가 비슷한 사람이 사는 환경이리라

좋은 영향력으로 서로를 감화시키고 그런 상호작용으로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게 나의 소망이자 소명이다. 그러기에 기꺼이 연말 승진 같은 돌발변수에 초연해질 수 있다.


종교를 가진 적은 없지만 가족과 교회 예배 시간에 종종 참여한다. 성경 말씀새기고 기도로 궁극의 메시아를 바라보고 갈망 하는것은 내가 추구하는 그 무엇의 방향성과 비슷한 결을 가진 것 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복음성가 속의 가사와 숭고함 속에서 울컥해지는 것도 그런 연결성에 내 무의식이 반응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찍이 그런 모습을 나는 ‘미운오리새끼’라는 글로 자서전에 써 내려간 적이 있다.

“저 멀리 나의 동족으로 보이는 무리가 보인다. 다가가서 물에 발을 담가본다.
조금 차갑지만 감당할 만하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잘 조화를 이루는 내가 보인다.
처음부터 미운 오리 새끼는 먼 길을 돌아왔지만, 어차피 백조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백조였던 것처럼
결국 백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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