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 커피 한 잔 -
진실..진실들, 말을...하지만 어떤 진실은 현실에서 날 것으로 정면으로 마주하면 불편해서 외면하고 도망가고 싶은 게 진실이다. 민주화 운동 시절 오윤의 판화를 차마 정면으로 못 바라본 이유다.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독일출신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브레히트의 시다. 주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주를 이루는 사회주의적인 작품 활동을 하신 분으로 저항하는 자들의 숙명대로 나치로부터 추방당해 여러 나라를 떠돈다. 핀란드, 러시아를 거쳐 미국에 정착. 그러나 겨우 정착한 미국에서조차도 우리나라 종북몰이 같은 매카시즘에 휘말려 추방당하고 스위스를 거쳐 동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다.
이 시는 1941년 모스크바에 결핵에 걸린 연인이자 동지인 스테핀을 남겨두고 훗날을 기약하고 탈출했으나 스테핀은 끝내 결핵병동에서 죽고 죄책감에 쓴 시라 한다.
민주화 운동 그 시절 화염병,최루탄,곤봉,감옥,고문, 으로 젊은 영혼들이 날마다 쓰러져 가는 데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했던 흉흉한 시간들 . 살기위해 진실을 잠시 잠재우고 도피한 시간들.
대학교 정문 옆 고급빌라에 막 안주했던 시절 이었다. 삼층 내 집 바로 위 옥상에서 최루탄 연기 속, 화염병 든 젊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지켜보다가 맨 앞줄에서 마스크 쓴 시위주동자가 남동생임을 발견한다. 가슴이 철렁했다. 걱정하던 일이 터졌구나. 동생 방에 행여 들킬까봐 숨 죽이며 숨어있었던 불온서적이라 칭했던 책들.
사실 그 책 속의 주인공들이 했던 말은 다 옳은 말이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못 배우고 소외된 분들도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몫을 찾으라고 손 잡아 주고 같이 걷는 것이 바른 인생길이라는 것. 자신의 입신양명에의 욕망은 과감히 버린 젊은이 다운 순수한 마음이었다. 권력자들에게는 체제를 뒤흔드는 위태로운 생각이었겠지만.
가장 잃은 친정에서 유일한 남자로서 친정의 생계를 책임져야할 남동생. 그러나 친정엄마의 눈물바람과 하소연도 막지 못했던 동생의 고집. 시위현장마다 나타났다가 쫒아가면 사라지던 동생. 결국 수배자가 되어 도피했다가 은밀하게 나와 만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나타난 형사에게 혁대 잡혀서 끌려가버린 동생.
그 동생을 찾아 미친년처럼 친정 엄마랑 헤맸던 며칠 .
그 책을 소지한 것만으로 안기부에 잡혀갔던 불온한 동생의 책들은 , 내 서재로 잠시 피신을 왔다. 피신 온 많은 책들. 동생을 이해하기 위해 하나 둘 읽기 시작했던 참 많은 사회 과학 책들. 그 책들 속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이라는 소설과 함께 숨을 턱 멎게 한 책이 ‘브레히트 시집 ’이었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너무도 정확하고 명징한 이 말은 내 가슴에 죄책감이라는 날카로운 검을 꽂았다. 도깨비라는 드라마에서 뺄 수 없는 검을 꽂고 살아야하는 형벌을 받은 공유처럼 살아남았다는 것이 불편하고 슬프고 편치가 않았다.
뻔뻔하고 비겁해서 살아남았다.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실천도 못하는 ....생각.
매음녀 1
..............
이렇게 살 바엔 -
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
쥐새끼들이 천장을 갉아댄다
바퀴벌레와 옴벌레들이 옷가지들 속에서
자유롭게 죽어가거나 알을 깐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들추고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의 시신을 내다버린다.
무서울 것이 없어져버린 세상.
철근 뒤에 숨어사는 날짐승이
그 시신을 먹는다.
정신병자가 되어 감금되는 일이
구원이라면
시궁창을 저벅거리는 다 떨어진
누더기의 삶은......
아으,
모질은 바람.
이연주 - <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
산다는 게 진실이라는 몸을 파는 매음녀처럼 느껴졌던 시대, 제 정신으로는 생존하지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어 감금되는 일을 오히려 구원이라 생각하게 했던 시궁창같은 누더기 같은 삶. 시인의 순수한 영혼은 불안과 소외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살이라는 극단의 길을 택하고 만다.
인간의 가장 깊고 어둡고 축축한 절망이라는 감정의 극한 바닥까지 진심으로 가 본 ... 생사교차지점이라 인간에게는 금기된 그 지점까지 내려가서 정직하게 진심으로 부딪혀 본 사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시적 공간. 끝내 자살이라는 극한 행동까지 가게 한 낯설고 생경했던 감정에의 경험.
당시에는 다른 유명시인들에 묻혀 공감하는 이가 적어 혼자 애지중지 귀하게 여겼던 시집.
요즘 재조명 받고 심플하고 세련된 블랙커버 시집으로 복간되는 것을 보면서 진심이라는 마음의 씨앗은 언젠가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 꽃을 피운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생각에 반갑고 요절해 버린 그녀의 삶이 안타깝다.
맨 정신으로 읽기 어려웠던 브레히트님,이연주님의 시집도, 추호도 타협이라곤 없는 오윤님의 철저한 저항 정신이 너무 적나라해서 부담이었던 판화그림도 이제 편하게 읽고 감상한다.이미 다 지나간 시간이고 실천에의 강박도 없으므로....
며칠 전에 다섯 명의 여자들이 단체 톡을 했다. 주제는 모처럼 무주반디랜드 가서 천문대 별 보자는 이야기이지만 , 박근핵닷컴에 참가하라는 내용, 명절 때면 제주 강정마을 밀감과 흑돼지 회비로 사주자는 이야기 ....가 꼭 들어가는 톡이다.
한 때 같은 학교에서 불온서적이라 칭했던 책들을 돌려 읽으며 사회적 이슈 때 혼자서는 무서워ㅠㅠ 같이 가끔 서명명단에 올리기도 했던, 교장 교감에게 잘 보이기 보다는 모자라고 짠한 아이들에게 과도한 애정세례를 퍼붓는 공통점이 있는, 남들이 보기엔 현실감이 모자라 절대 승진하지 못하는 아니 그런데는 관심도 없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모임 이름이 교감회인... 그러나 만나면 행복한 오래오래 만나게 될 지기들과의 단체톡....이 두 권의 책들을 만난 덕분에 생긴 귀한 인연 들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비밀을 폭로하신 두 분께도 차 한잔 드리겠습니다.
당신들 말이 맞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것은 강하고 비겁하고 뻔뻔해서입니다.
두분 께는 그때 그 시절의 블랙커피 한 잔 드립니다.
지금처럼 고급 생두도, 고급차도 ,완벽한 비율로 섞인 커피믹스도 없던 그 시절. 가끔 미국 다녀오신 지인에게서 냉동 동결 미제 오리지날 인스턴트용 커피 한 봉지 받으면 득템했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그때 . 차대접이라면 분말가루 진득한 거의 스프수준인 땅콩차나 율무차, 설탕범벅인 유자차, 아니 가장 흔한 것이 맥스웰하우스 커피,프리머,설탕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서 만든 커피 대접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커피2스푼 프림 2스푼 설탕2스푼, 어떤 이는 커피1,프림 2,설탕 3 어떤 이는 커피만 1 등으로 커피와 프림과 설탕의 배합 취향도 제 각각이었던 시절. 그 사람의 커피 배합비율을 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고 질문없이 알아서 커피 한 잔 타주는 것이 친하고 가깝다는 증명이 되던 시절.
그 시절 부끄러운 자의식이 있던 주변의 지인들은 모두 금욕적인 커피를 원하고 좋아했습니다.
달달한 욕망의 설탕 빼고 허세의 거품인 프림 빼고 딱 한 스푼의 커피알갱이만 투박한 도자기 머그컵에 투척해서 뜨거운 물 가득 넣어서 마시던 그런 커피.
도자기 머그컵은 청각장애인 작품 전시회에 가서 사 준 못생겼지만 진심이 담긴... 그런 아주 촌스럽지만 아날로그적인 사람사이의 정과 부끄러움이 살아있던 시절의 블랙 커피 한 잔 드립니다.
굿바이 .. ...차마 당신들에게는 ......침묵으로....작별의 마음을 전합니다.
언어보다는 광화문에 촛불이라도 들고 나가는 것이 부끄럽게 살아남은 자의 최소한의 도리라는 당신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