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장례식
2019년 4월 26일 금요일, 투병 중이시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오늘은 장례미사가 열리는 날이다. 이 미사를 엄마가 다니던 성당에서 드리기 위해 우리는 4일장을 치렀다. 제단에는 흰 국화를 싫어한 엄마를 위해 친한 꽃가게 사장님이 붉은 장미와 수국, 카네이션을 꽂아주셨다.
엄마 장례식장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성당에서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빈소에 와 사진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린 분, 요즘 왜 안 보였나 궁금했다던 수선집 아주머니, 집 근처 주차장 아저씨, 성당에서 엄마가 활동하던 단체의 분들.
장례미사를 앞두고 신부님께 질문을 받았다. “자식들이 기억하는 엄마는 어떤 분이신가요?” 우리는 ‘~걸, ~할 걸’ 하지 않는 분,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때 기쁘게 해 주라고 늘 이야기하시던 분, 사랑은 행동이고 실천이라 믿었던 분,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했던 분이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엄마는 다른 사람을 챙기던 에너지를 자신에게 집중했다면 조금 더 오래 사셨을지도 모른다. 곁에 있는 누군가를 늘 챙기고, 가방에 있는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하고,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면 지인들과 꼭 며칠 안에 함께 가야 하는 분이었다. 엄마는 주는 기쁨, 나누는 행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나는 삼 남매 가운데 유독 엄마와 사이가 좋았고 코드가 잘 맞았다. 그만큼 밀착된 시간을 보냈고 가끔은 그 시간이 피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지나왔기 때문에 엄마의 장례식을 준비하며 엄마가 무엇을 가장 좋아했고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하고 헤아려 판단할 수 있었다. 엄마가 엄마답게 사시고, 삼 남매가 다 모인 병원에서 편안히 임종하셨음에 깊이 감사한다. 더불어 엄마의 장례식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던 시간이 주어져 활짝 웃는 영정사진을 고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부모님을 떠나보내는 일은 모든 자식이 치르고 겪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큰 비극이기도 하고 공평한 인생의 숙제 같기도 하다.
엄마는 마지막 21일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셨고 그곳에서 나도 함께 했기 때문에 나 또한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늘 생각했다. 매일 병동에서 지내는 엄마를 지켜보고 말을 하고 손을 잡았다. 나중에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으니 조금 더 시간을 보내려고 최대한 애썼다. 그래서 장례를 치르고 와주신 분들에게는 아쉬움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엄마의 목소리와 말은 벌써 그립고 그립다.
장례식장 맞은편 벽면에 걸려있던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떠오른다.
저 세상으로 보내고도
곧 그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
내내 아파하는 이들에겐
마음껏 그리워하라고 말하는 게
더 아름다운 위로가 아닐까
오늘은 그런 생각을 해
이해인, 『희망은 깨어있네』「이별의 아픔」, 마음산책, 2010, 163쪽.
엄마를 보내드리면서 생각하고 정리하고 쓰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쌓여간다.
2019년 4월 26일 세상 하나뿐인 엄마가 돌아가신 뒤
인스타그램에 엄마의 세례명을 딴 #로사리아의선물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글쓰기란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하는 일' 이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말을 아낍니다.
이제, 세상을 떠난 엄마이지만 엄마와 나눈 시간, 말과 행동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글로 남겨둡니다.
훗날, 엄마를 잃게 될 많은 딸들과도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제 10회 브런치북 응모를 위해, 지난 글을 정리해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