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나날들

위태로운 마음아 안녕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아요 #8

불안한 나날들


하고 싶은 일 - 글쓰기, 독서, 모임 오픈하기- 에 넘칠 정도로 마음을 들이부으며 살고 있다. 마음 곳간에 저장해놓은, 그러니까 온갖 모양이 모아진 마음들, 이를테면 정성, 욕망, 질투, 죄책감, 공감, 서운함, 원망, 분노, 유쾌, 즐거움, 보람 그리고 나머지 존재감 없는 마음들까지도 모조리 동원하면서. 태어난 곳도 다르고 사는 것도 제각각인 마음들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느라 하루가 지나가는 것도 모른 채 산다.


그런 모양도 없고 감응도 없는 마음들에 눈길을 주노라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그것들을 세상 바깥으로 비워야겠다는 책임감이 따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은 버려지고 무엇은 채워지는 선택을 맞게 될까? 채우고 비우고 또 채우고 비우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 인생이란 곳간에 비축된 온갖 마음들이 숙성되기를 기다리며, 단조로운 반복이라도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대부분의 인간이 숙성시키지 못한 마음을 세상에 내보내겠지만.


카페 한쪽 구석에 앉아 두꺼운 책 한 권에 마음을 의지하고, 고독에 취해 한동안 꼼짝하지 않고 세상과 차단된 벽에 기대 글을 쓰고, 깊고도 검은 아메리카노 향에 마음을 푹 담가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숙제 같은 것들에 기댄다. 이를테면 고독, 아니 고독으로 위장한 외로움 같은 것들. 온몸으로 거부해도 갑자기 찾아드는 원인 불명의 모양들이 나를 탓할지도.


퇴사하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내가 주체가 되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찾아오는 이상한 질문, 덜 익은 질문 때문에 나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악몽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고독에 대한 갈증, 철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삶의 숙제들, 그럼에도 여지없이 찾아오는 평온하기만 한 아침, 기지개를 크게 켜며 맞는 아침 햇살의 한가로움, 평화롭기만 한 파란 하늘,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검은색 그림자, 영영 헤어질 생각이 없는 혼란스러운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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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3일 출근하는 회사에서 제안이 들어올 듯하다. 완벽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맞았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프리랜서가 더 편안하다. 일에 대한 고민과 방황은 3일이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많은 연봉을 제안받는다 한들 프리랜서의 신분을 버릴 생각이 없다. 인생의 반을 넘게 살아도 인생의 진로를 잡기 어렵다. 마음을 놓을 때마다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은 시야를 어지럽힌다. 모두가 만족 가능한 안은 세상에 없으리라. 오직 나만을 위한 안, 한 가지 대안만이 존재할 테니.


담당자와 대담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문이 작은 카페를 열고 들어선 나는 바닐라 라테를 주문했다. 쓴맛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었기에 의식적으로 아메리카노를 거부한 것이다. 가을이 지나가는 저녁 어디쯤에서, 나는 잠시 공상에 잠기다 현실로 급하게 돌아와야 했다. 그는 메뉴 대신에 나에게 몇 가지 사항을 전달하고 카드로 결제를 마쳤다. 그리고 그는 말문이 트인 사람처럼 입을 열기 시작했다. 회사에 풀타임으로 일해야 한다면, 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매출을 어떻게 일으킬 것이며, 이를 위해 팀원은 몇 명이 필요하며, 어떤 사업들을 펼칠 계획이냐고. 형식적인 질문이나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원하지 않는 면접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입사를 위해 면접을 보는 자리인지, 투자를 위해 누군가를 설득하는 자리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가을이어서 그랬을까, 창밖으로 울렁대는 기류의 높은 흐름 탓이었을까, 나는 어지럼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밖에서 천천히 말을 맞춰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아끼지 않을 태세였다. 과거의 나라면 절대 쓰지 않을 직설적인 화법 같은 것들, 회사는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냐고, 내 능력을 돈 주고 살만하다면 얼마를 줄 수 있냐고. 새로운 고용계약을 맺길 원한다면 새롭게 도장을 찍으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계약을 종료하면 될 뿐이라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실컷 게워냈다. 속이 후련했다. 라테가 속에서 말끔하게 씻기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메리카노가 그 순간 생각나는 건 왜였을까.


인생이 불투명하다고 누군가는 정의를 내렸다. 그 이유는 무엇이든 붙들게 하려는 나약함을 일으킨다. 안정된 수입, 보장된 정년, 그런 것들에 더 이상 포위되지 않아도 된다고, 누군가 무책임한 말을 남발하더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냉정한 말을 남겨주길 기대한다. 인생을 오래 살아본 선배의 따끔한 말이 가끔 그립다. 안정과 불안 사이를 오가면서도 어느 한쪽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퇴사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모두 경험한 나로서는 여전히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퇴사 이후에는 이전이 그립고, 이전에는 이후가 다시 그리워질 테니.


인생은 이렇게 마음을 쏟아내고 비우는 과정을 반복한다. 인간의 시계로는 빠르고 우주의 시계로는 하염없이 느리겠지만. 양면적인 속성을 가진 것이 인생의 모양이겠지.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시간을 되짚어 보며, 오늘은 얼마나 가쁜 숨을 몰아쉬었는지, 곳간에 아껴둔 마음을 몇 개나 소모했는지 반문한다. 그런 순간엔 이유 없이 무력증이 찾아오기도 들뜨기도 한다. 그 정체가 고독인지 허탈함인지 알 수 없으니, 구름 속을 헤매는 선택을 하련다. 모순적인 인간. 그래,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고, 고독이든 그것을 예쁘게 포장한 외로움이든, 무엇이든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닌 거라고. 그걸 인정하면 할수록 더욱 나에게 가까워진다면, 어떤 인생을 살든,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게 인정의 정체일까. 타인에게 굴복하는 게 대부분인 삶이어도 때로는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고 용기를 내는 것도, 배고픔을 즐기겠다는 자세도 모두 타인에게 받고 싶다는, 인정이라는 단어에서 출발하는 걸지도. 우리는 모두 인정에 고픈 인간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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