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26. 2019

인생을 반전시킬 묘수는 없는 걸까?

나는 오랫동안 하수였다.

2시, 고객과의 약속을 앞두고 버스 정류장까지 작은 걸음으로 이동 중이었어.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을 왼쪽으로 지나 폭이 좁은 왕복 2차선 도로에 접어들었지. 파란 하늘, 자동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고즈넉한 도로, 바람은 차분하게 아스팔트 주변을 지나다니더라. 가을이 막 시작되었다고 자연이 내게 손짓을 하는 듯했어.


터덜터덜 걷다 보니, 모퉁이 끝에 한가롭게 휴식 중인 개인택시 여러 대가 눈에 띄었어. 그래, 택시 기사님에게도 가을은 한창 무르익었겠지.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 낮잠이라도 즐기시는 모양이구나. 그래, 그늘 밑이라면 잠들기 적당하지,라고 생각하며 지나갈 무렵, 보도블록 위에 쪼그려 앉은 세분의 그림자가 보였던 거야.


세 아저씨는 길 한쪽 구석에 판을 깔아놓고 옷을 잔뜩 구긴 채 주저앉아 있었어. 아마도 내기 바둑에 흠뻑 취해 있던 모양이야. 한 분은 엉거주춤하게 쪼그린 자세로 검은 돌 몇 개를 한 손에서 반대편 손으로 튕기다 바둑판을 힐끔 바라보곤 했어. 그분은 지나가는 사람의 눈치를 보기도 바둑판을 들여다 보기도 했어. 나머지 한 분은 바닥에 털썩 주저잖아 오직 바둑판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 깊은 생각에 잠기면 묘수라도 번쩍 떠오르게 될까? 옛 실력을 되살려 훈수라도 한 수 두고 싶었지만,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어.



나는 순간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어. 내가 6급이니까, 훈수를 두면 승부에 영향을 미치겠지? 저 아저씨 날 쳐다보는 눈빛이 왠지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에이, 나서지 말고 갈 길이나 가자. 이런 건방진 생각, 근거 없는 생각만 가득 머릿속에 늘어놓다 자리를 떴어.


군 시절 싸움 바둑을 독학으로 배웠어. 정석 따위, 포석 따윈 필요 없이 오직 상대방에게 거친 싸움을 거는 기술에만 능통했던 거야. 상대방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비정한 세계, 한 집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집요하게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하는 세계가 바둑이었어. 까칠한 나와 안성맞춤이더라, 바둑이란 세계.


바둑은 절대 배우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무료함을 견디려면 바둑은 필수였지. 아버진 바둑만 평생 두다 돌아가셨어. 아마 3단 정도 되니까 동네에서 바둑을 잘 두는 사람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걸로 기억해. 취미로만 바둑을 즐겼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진 그러지 못했어. 내기 바둑 때문에 우리 가족은 생계에 심각한 곤란을 겪어야 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미운 아버지에게 어느 날 바둑을 배웠어. 인터넷 바둑 급수에 한참 미쳤던 나는 라이벌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싶었거든. 아버지는 흑돌 25점을 깔아주며 여유를 부렸지. 상대방에게 싸움만 급하게 걸지 말고 숲을 보듯 크게 그림을 그리는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적을 제압하려면 싸움에 관심이 없는 듯 딴청을 부리는 전략으로 그를 안심시키고 서서히 급소를 조여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야 안전할 거라고 착각하던 적의 심장부를 한방에 끝낼 수 있다고 말했어.


나는 하수였어. 큰 싸움만 걸 줄 알았지 수습할 능력은 부족했던 거야. 내가 기대하던, 위기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킬 만한 묘수는 100번에 한 번 나올까, 말까라는 사실. 그 묘수 하나를 건지기 위한 진흙탕 싸움에 중독되고 말았다는 사실. 마치 인생에서 결정적 한 방만을 노리는 승부사처럼 줄곧 살아왔다는 사실.



상상은 잠시 접어둔 채 걷다 보니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버스는 1분도 안되어 도착했어.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찾다 내 인생을 반전시킬 묘수, 판을 뒤집을만한 깜짝 카드란 과연 존재할까, 생각했어. 그런 게 어차피 있을 리 없잖아.


9회 말 역전 만루홈런만큼 짜릿한 승리는 흔하지 않아. 그런 거에 기대다 보면 좌절하기 더 쉬울 거야. 나는 내가 늘 승부사가 될 거라고 고난과 역경을 딛고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주인공이 될 거라고 믿었어. 언젠가 판을 뒤집을 기막힌 묘수를 두고 말 거라는 상상은 거두지 않고 살아왔어. 애석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영웅이 되지 못한대. 뼈를 때리는 말이지만 현실이야. 한방을 기대하는 삶은 좌절하는 현실을 환기시킬 뿐이지. 난 인터넷 바둑이나 다시 시작해볼까, 생각하다 바둑은 이제 그만이라는 결정을 내렸어. 써야 할 글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바람은 참 파랗기만 하더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