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대생의 심야서재 Jun 08. 2020

당연한 것들도 언젠가 잊힌다

일상 에세이

에세이란 무엇일까?


일상의 평범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을 담아내는 것.

- 공심


한바탕 운동을 마친 후, 땀을 씻겨 내기 위해 샤워기를 틀었다. 더운물이 곧 나올 거라 믿고, 물 흐르는 걸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태. 찬물을 바닥으로 하염없이 흘려보내다, 공사 때문에 열 공급을 중단한다는 안내방송을 겨우 기억해냈다.


몸이 꽤 뜨겁게 달아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온몸으로 찬물을 감당할 만큼 순순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모자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충분히 채워지지도 않은, 그러니까 난 그저 그런 상태에 불과했으니까. 나에겐 적당하게 미지근한 물이 필요할 뿐이었지만 그 순간에 난 세상 어떤 존재와도 타협하기 어렵다는 사실 받아들여야 했으니.


나는 잔소리인지 짜증인지 구별할 수 없는 말 따위를 잠시 지껄이다, 이 사태를 관망할 수도 그만둘 수도 없다는 걸 이해해야 했다. 결국 적응이 필요했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일들이 때로 당연하지 않다는 결과에 적응해야 했고, 당연한 것들이 오늘처럼 예고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도 적응해야 했다.


당연한 것들은 무엇인가. 나는 당연하게도 주체적인 나로 살아간다. 아니 그렇게 되고 싶지만, 이론적일 뿐이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 사실은 내가 당연한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는 걸 역설적으로 증명하기도 한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지금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니 지극히 당연한 것인가. 나는 지금 이 순간, 생각을 단 한순간이라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생각한 사실을 글로 표현할 능력이 있으니 존재하는 것은 마땅히 그 자체로 증명될까. 그렇다면 생각한 사실을 글로 옮기지 못하거나, 바람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볼 것인가.


나는 나로 살아가기에, 마땅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기에 나는 당연히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아침마다 어김없이 눈을 뜰 때마다 나는 당연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 창밖에 햇살이 집안 구석구석을 감싸며, 반쯤 열린 창문 사이로 신선한 바람이 드나들며, 눈을 슬며시 뜨며 내가 아직 호흡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 있는, 그래서 이 당연한 하루의 반복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감사하게 되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들은 가끔 당연하게, 아니 허무하게 잊힌다. 당연한 것들은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너무나 가까운 가족, 사랑하는 친구들, 당연히 내 옆에 있기 때문에 가끔 그 사실을 잊기도 하는, 그냥 당연한 공기 같은 존재들. 


당연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은 허무하게도 시야에서 멀어져 간다. 너무나 미워했고 때로는 증오했지만, 언제나 옆에서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당연한 아버지조차 결국 부재하다는걸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처럼, 당연한 것들은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너무나도 충만한 행복감에 젖었을 때 문득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을 차갑게 내리누른다. 오늘 오후, 샤워를 위해 따뜻한 물을 당연하게 기다렸던 나의 오만처럼, 당연하게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그 어떠한 존재도 아침 햇살이 오후가 되면 사라지듯 슬며시 어디론가 흘러내리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허전함, 부재함, 그리고 잔혹할 정도로 서늘한 감각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살아있기에 당연히 숨을 쉬고 온몸의 감각이 깨어있으므로 이 어둡고 소름 끼치는 당연함의 몰락을 순순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래, 코로나 때문에 우린 이미 많은 당연함 들을 잃었다. 그러나 얼마나 더 많은 당연함 들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야 할지 여전히 모른다. 코로나 이후 시대는 그런 사실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야 할까. 내 당연함 들은 앞으로 유효기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나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정신이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서 나에게 고함을 쳐댔지만, 나는 듣지 못한 자에 불과했다. 나는 입을 닫고 있었지만 애원하듯 세상에 답을 달라고 구걸했다. 그래 봤자, 차갑기만 한 감각만 살아 돌아왔지만.


하지만 나는 당연하게 오늘의 기억들을 잊겠지. 24년 동안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앞으로도 감당할 테지만, 당연한 것들은 그냥 당연할 뿐이어서 당연하게 부재하게 될 테니까. 어둠을 순순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딜런 토마스(Dylan Thomas)의 시구처럼 나는 이 차가운 어둠을 순순하게 거부할 수 있을까. 내가 언젠가 당연하게 존재하지 않게 될 순간을 거부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전 01화 인생을 반전시킬 묘수는 없는 걸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