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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Sep 20. 2020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면

https://www.youtube.com/watch?v=_f5TNGC2qk0&ab_channel=bebebunny

음악을 들으면서 읽는 걸 추천합니다.



세상도 나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변화를 굳이 알아차리지 않아도 계절은 하얗게 탈색된 커튼처럼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어쩌면 사라진다는 말보다 자리를 내어준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주인은 원래 없던 세상이었으니까. 가끔 누군가에게 공간을 양보했던 어느 순간처럼, 계절이 외피를 하나씩 벗어가면 나는 더 두꺼워졌고 더 세심하게 변했다.


며칠 전까지 가득하던 풀벌레들의 소리도 하나둘씩 사라질 것이다. 귀가 어두워진 것은 아닌데, 지구가 더 이상 자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지구가 멈추는 날은 아닐까. 우주의 끝으로 도달하려면 465억 년이 걸린다던 과학자의 음성이 오늘은 가깝게 들려왔다. 나는 듣는 걸 거부하고 오직 걷는 사람으로만 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내 소리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었나. 빛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희미한 별 하나에 의지하여 걷는, 청춘의 골짜기 끝에서 어둠이 흘러내린 잔향에 스며든 채.


그들은 모두 어디로 여행이라도 갔을까? 따뜻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밤을 하얗게 밝히던 그들은 나를 찾는 여행이라도 떠난 건가. 몇 백억 광년을 감당하기 위해 돌아올 수 없는 탐험이라도 떠난 걸까. 나도 여정을 떠나고 싶지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짊어졌으니 거북이처럼 기어갈 뿐이다. 그걸 잔뜩 안아들고 일터로 나가야 한다. 죽음을 향해 바스러지던 모든 소리의 원성을 넘겨가며.


바닥에 깔린 낙엽을 밟지 않고 지나 보려 애썼다. 너무 많은 아픔들이 길가에 스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무의미한 짓이었으나 한철 살다 간 그들의 짧은 삶을 기린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오랫동안 그늘이란 걸 그들에게 빚지고 살았으니까. 가려지고 숨겨지며 때론 숨을 크게 내쉬기도 했으니까.



양옆으로 아이들이 느리게 걸어갔다. 나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갔으므로 아이들 몇 명의 스치는 문장 몇 개쯤만 귀에 담을 수 있었다. “걔는 이번 시험에 10개를 찍었는데, 3개밖에 틀리지 않았데” 아마도 시험에서 얻은 놀랄만한 확률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래 나도 그런 성공적인 기억이 있었다.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두고 포기라는 말은 내밀기 싫어서, 하릴없는 운수에 기댄 자존심만 센 순간들. 낮은 확률이지만, 동원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나를 탓한 순간들.


난 과거를 무의미한 확률에 맡기고 살았다. 실패한 확률들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쓸모 있는 것들로 대신 채워졌다. 뭐 성공이었다고 평가할만한 것도 없지만, 난 작은 순간들조차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더 숨 가쁘게 남들보다 이르게 도착하려고 오늘처럼 급하게 길을 지나가는 것이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으나 해는 꽤 낮게 기울어져 있었다. 여전히 눈이 부셨지만 난 햇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려 했다. 한 달 전만 해도 햇살에서 멀어지려 했다. 은행나무 뒤에 숨어서 빛과 철저하게 차단되려 애썼다. 그런데 나는 지금 햇살을 찾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었다.


고동색, 또는 갈색으로 탈색되다 쓰레기 취급을 받을 낙엽의 흔적들에게도 햇살은 공평하게 쏟아질까. 그들처럼 나도 언젠가 까맣게 타들어가겠지. 그럼에도 난 이기적인 인간이라 겨울이 곧 가까워졌음을 상상하며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재차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버려야 할까. 사람에 대한 욕망일까. 아니면 세상의 순리에 대한 부정일까.


은행나무 잎이 길마다 노랗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노란 잔디 위를 뛰어다니고 자전거 한 대가 재빠르게 지나가기도 했다. 기다리던 버스는 언젠가 도착할 테고, 나는 또 창가 끝 의자에 앉아 한철을 지나 돌아온 온기에 감사하게 되리라. 그리고 지난가을의 생생한 하늘과 썩어가는 은행 열매의 마지막 순간을 공상하리라. 숨죽인 채.


삶을 견디려면 햇살이 소중하다. 보호받고 싶다면 가진 걸 하나쯤 양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할까. 우선순위를 하나씩 매겼다. 직장, 프리랜서, 작가, 모임, 글쓰기, 독자 단어들이 기다랗게 행렬로 늘어졌다. 나는 배분을 해야 했다. 버릴 것과 그렇지 않을 것들을.


계절이란 건 인간에게 적응을 원한다. 다만 느린 변화를 원했다. 인간은 빠르고 찰나에 머무를 뿐이지만, 많은 걸 안고 뛸 수 있다고 자신한다. 나는 햇살을 품에 가득 안아들고 운동장 한 바퀴를 뛰어보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불가능할 만큼 나이를 먹었을지라도 난 그런 의미 없는 행위에 삶을 던지련다. 그 어떠한 엉뚱한 행위도 가을이라면 전부 용서가 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을 나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최대, 최고, 최선이라는 낱말들, 난 얼마나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얻은 안정에게 찬사를 보낼 수 있을까. 높이, 너비, 깊이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더 발악을 하고 살아야 할까. 계절은 이렇게 선물처럼 찾아와 다시 무심하게 떠나가는데, 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앞으로도 길가에 흘리며 살아야 할까. 내 마음엔 몇 백억 년을 살아온 햇살이 날아와 쉬어가는데, 난 보이지도 않는 끈을 이리도 탱탱하게 당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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