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랄 비용 대신 생존 비용
퇴사를 하고 나면 돈을 아껴야 한다는 압박을 강하게 받는다. 들어올 돈이 없으니 가진 돈을 최대한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하다. 퇴사 전처럼 카드를 쓰면 한 달 안에 파산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돈을 하나도 쓰지 않겠다는 생각만 강해지면 스스로의 존엄이 줄고, 자존감도 바닥을 향할 수 있다. 또한 부분별 한 지출 감소로 삶의 리듬이 망가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 줄여야 하는 지출과 지켜야 하는 지출을 구분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결국 삶은, 연결과 유지가 중요한 것 아닐까?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요인 중에 나는 유지와 연결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군가와 함께, 세상이라는 거대한 커뮤니티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과정을 위한 지출에는 조금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 이동비, 작은 사치는 허용하자. 집에만 있으면 지출은 줄일 수 있지만 정신이 피폐해지기 쉽다. 핸드폰과 컴퓨터 세상에 갇힐 확률도 올라간다. 온라인 세상과 현실 세상의 괴리는 간혹 나를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일단 집 밖으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쓸 수밖에 없는 돈, 교통비와 커피 한잔 비용 정도는 스스로에게 허락했으면 한다. 햇빛을 보고, 바람을 맞고, 계절의 변화를 체감하고 세상의 움직임과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 이 과정이 퇴사자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하루 5천 원씩, 한 달이면 15만 원이다. 15만 원은 나의 작은 사치를 위한, 혹은 일상을 위한 돈으로 지출 항목에 적어 두자. 앞으로 다시 세상에서 살아갈 나를 준비하는 비용인 셈이니까.
식비 지출도 과도하게 줄이지 말자. 매 끼니 배달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배달음식 대신 내가 먹을 음식의 재료비를 아끼지 말자는 것이다. 고기가 먹고 싶은데 퇴사했으니 고기는 사치야,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식사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일주일 동안 무엇을 먹을 것인지 생각하고, 알맞은 식재료를 사고, 직접 음식을 해서 먹는 과정을 스스로 수행하면 일단 먹고사는 일이 체감된다. 하루 생존의 필수 과정을 스스로 수행했다는 감각을 얻기도 한다. 먹는 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음식은 몸을 지키는 최소한의 양식이고, 몸이 건강해야 생각도 건강해진다. 몸이 건강해야 다음 계획을 수립하는 것도 가능하다. 건강을 잃으면 직장을 잃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말 그대로 생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건강을 지키는 것을 한 끼 식사로 시작할 수 있다. '건강하게 먹고사는 하루'를 위한 지출은 조금 여유롭게 계획해야 하는 이유이다.
연결과 유지 다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정이다. 심리적 안정을 위한 지출도 필요하다. 봄이라면 꽃 한 송이, 여름이라면 시원한 만화방 1시간권 등 내가 좋아하고,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소소한 지출은 허용하자. 이렇게 작은 위로 지출은 힘든 시간을 견디는 원동력이 되어 준다. 퇴사자의 마음에는 불안과 죄책감이 공존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일상을 기쁘게 만들어 줄 지출로 이런 감정을 상쇄할 수 있다면 훨씬 나은 하루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나 역시 일상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예비 지출비를 지출계획에 포함했다.
진짜로 줄여야 할 지출은 '비의식적 소비'
반대로 꼭 줄여야 하는 소비는 보상소비다. 회사를 다닐 때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무의식적으로 쓰던 돈, 지랄 비용들을 점검해야 한다. 이유 없이 배달앱을 열고 시켰던 자극 강한 음식, 살 마음도 없었는데 결제한 온라인 쇼핑몰의 아이템, 싸다는 이유로 산 불필요한 아이템 등 내 감정적 보상을 위해 의식없이 소비하는 경험을 줄여야 한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기 쉽다. 감정의 공백을 소비가 채워주지 않는다. 소비는 불안을 억누르는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사실을 스스로 인지해야 한다.
소비 기록이 큰 도움이 된다. 매일 소비 기록을 적으면서 하루를 정리하는 습관을 만들면 돈과 감정 모두를 지킬 수 있다. 내가 쓴 돈이 필요한 소비였는지, 감정적 소비였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는 기준을 만들어 갈 수 있다. 기록은 내 삶의 패턴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돈을 아낀다고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불안을 통제하려면, 통제 가능한 지출 구조를 만들고 보완과 수정이 가능한 기록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