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숫자로 생존기간 계산하기

일하지 않고 나는 얼마의 기간 동안 생존할 수 있을까?

by B의취향

퇴사 후 가장 먼저 찾아오는 불안은 '돈'에서 시작된다. 일을 할 때는 성과가 숫자와 연결되어 있었다면, 퇴사 후에는 생존이 숫자와 연결된다. 수학의 계산법 대신 수학의 의미, 숫자를 알아야 인생이 좀 더 나아진다는 말의 진짜 의미를 진즉 알았다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든다. 지금도 이차방정식이 제일 좋은 거 보면... 내 수학은 철저히 계산놀이였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불안은 결국 삶의 연속성, 유지력과 연관된다. 돈은 행복을 담보해주진 않지만 최소한의 불행을 막아주는 절댓값이다. 유지력과 연속성 면에서는 최정예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앞으로 한 달을 어떻게 버티면 될까?"

"나가야 하는 돈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지금 내 통장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막연한 미래보다 눈앞의 숫자,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정확한 숫자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이 커지고, 불안이 증폭되면 올바른 사고를 하기 어려워진다. 불안해서 소비를 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악순환의 고리를 스스로 만드는 셈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 일단 재정상태를 점검하고, 내 삶을 숫자로 정리해 보자. 물론 보기 싫다. 월급이라는 고정 수입이 있을 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일단 시스템이 운영됐다. 그런데 전기가 끊어진 상황이니 보기 싫어도 꼭 시스템 점검을 해야만 한다. 숫자를 외면하면 불안은 더 커진다.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이 숫자가 참일 리 없어...!

일단 모든 계좌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했다. 만들어 둔 노트에 하나씩 직접 적었다. 좋은 어플이 많아서 30초면 다 정리해 주는 거 물론 알고 있지만, 직접 숫자를 확인하고 적으면 좀 더 각인되는 것 같다. 현실직시. 온라인에서 둥둥 떠다니는 숫자가 아니라, 내 삶에서 쓸 수 있는 숫자로 바꾸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계좌, 모든 현금을 정확하게 적었다. 마음에서 '이 숫자가 진짜일리 없다'는 절규가 계속 메아리처럼 울렸다. 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지...?


현금 자산을 확인한 후에는 한 달 생활비를 적었다. 월세, 통신비, 보험료, 대출이자, 식비 등 반드시 써야만 하는 고정비를 정리하고 각 카드별 결제 금액도 적었다. 남은 할부 금액까지 전부 적어서 월별로 얼마의 결제가 예정되어 있는지 정리하고, 현금에서 일단 카드 결제액을 제외했다. 그 후에 현금을 고정비로 나눠 내가 버틸 수 있는 기간을 계산했다. 퇴직금을 받았으면.... 2년을 일했으면... 2개월은 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안 되는 거지? 이건 절대 풀 수 없는 미스터리이자 답이 뻔했다. 하아. 카드값의 압박!


생존 가능 기간이 계산됐으면 정확하게 "나는 앞으로 몇 달을 버틸 수 있다"라는 문장을 적어 두자. 물론 회피하고 싶지만, 그런다고 통장의 돈이 불어나는 건 아니다. '이래서 은퇴 후 생활비를 준비하라는 유튜버들이 많은 거구나, 이래서 다들 돈이 돈을 버는 구조를 만들겠다고 그렇게 애쓰는 거구나' 등 그동안은 무심코 지나쳤던 콘텐츠의 내용들이 절로 납득이 될 뿐. 그럼에도 내 남은 수명이자 내가 부릴 수 있는 여유의 시간값을 확정하면 신기하게 기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마음에 작은 안정이 찾아온다.


행복의 공통분모, 내 삶을 내 뜻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


어찌 되었건 생존 가능 기간을 알았고, 이제 어떻게 이 기간을 더 늘릴 수 있는지, 어떻게 버티는 힘을 기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된다. 내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가 명확해진 셈이다. 숫자를 정리하니, 생각이 명료해진다. 불안의 실체도 눈에 보인다. 돈만 있으면 다 괜찮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돈이 있으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고, 잘못된 선택을 최대한 줄여주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그토록 바라던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 여유롭게 하루를 계획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 읽고 싶은 책을 보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며 하루를 온전히 내 마음대로 쓰는 일. 내 삶을 내 뜻대로 살 수 있는 기본값은 돈에 대한 불안이 없어야 가능하다. 물론 돈이 갖춰지면 어떤 불안이 다시 찾아올 지도 모른다. 불안이 0인 인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다만 생존과 자존감을 지키는 절댓값, 생활 안정을 지켜줄 절댓값의 역할로 돈의 기능을 이해하는 계기는 되었다. 행복한 일상은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한 기준을 재정립하기 위해 일단 내 삶을 지탱하는 숫자를 명확히 인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돈이 내재하는 가장 큰 가치는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돈이 있으면, 즉 아직 사용하지 않은 자산이 있으면 독립성과 자율성이 조금씩 쌓인다. 언제 무엇을 할지 나에게 더 많은 결정권이 생긴다는 뜻이다."

- 모건 하우절, <돈의 심리학>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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