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대는 좋지만, 병약한 편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잦은 잔병치레로 골골거리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173cm. 65kg. 떡 벌어진 어깨와 제법 다부진 체격은 ‘딱 보기에도 운동 잘하게 생겼’지만 나는 운동이 싫었다. 땀나는 것도 싫고, 움직이는 것도 싫고, 누군가와 부딪히는 일은 더더욱 싫었다. 조용히 가만히 앉아서 책 읽고 글 쓰고 TV 보는 것이 좋았다. 어렸을 때는 지하철에서 ‘운동할 생각 없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종종 만나곤 했다. 뭔가 마음만 먹었다면 운동선수로 충분히 해볼 수 있는 피지컬이지만, 움직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저 고요한 인생이었다.
내 삶에는 크고 작은 염증이 늘 내 옆에 있었다. 결막염, 중이염, 감기, 독감, 몸살, 염좌 등등 사소하고도 귀찮은 염증들이 반려병처럼 늘 곁에 나와 함께 했다. 소소한 병원비가 많이 나왔다. 3,300원짜리가 10개면 33,000원. 이런 식이었다. 여기에 약값 3,000원짜리 10개면 33,000원 추가된다. 한 달에 6만 원짜리 병원비 인생이었다. 다행히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수술을 해야 하는 큰 병을 앓아본 적은 없었다. 그저 움직임을 최소하하며 소소하게 살고 있었다. 병이 나면 병원에 의지해 염증을 치료했다. 삶을 연명해 나가는 단순한 삶이었다. ‘잔병치레 많이 하는 사람들이 오래 산대.’라는 말이 내 건강을 담보하는 부적 같은 말이었다.
아이 둘을 낳고 서른다섯쯤 되었을 때부터는 정형외과 비중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어깨가 아팠고, 허리가 아팠고, 손목이 아팠다. 당시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돈도 스스로 벌겠다는 사명감이 컸을 때였다. 돈을 벌지 못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낙오가 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당시 나는 재택근무를 하며 해외관광청 온라인마케팅일을 하고 있었다. 새벽 네 시면 일어나 눈뜨자마자 일을 했고, 일곱 시면 하나둘 눈뜨는 두 살, 다섯 살 어린이들과 함께 정신없는 아침을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 집 아이들은 정말 말랐었다. 남편이 애들 좀 제발 잘 먹이라고 애걸복걸할 정도로 뼈만 겨우 붙어 있는 수준이었다. 둘째는 계속 아팠다. 태어나자마자 아토피가 심했고, 중이염이 1년 넘게 따라다녔다. 엄마는 기골이 장대한데, 아이들은 작고 소중하니 아이들이 실제보다 더 작아 보이는 착시 현상에 시달렸다.
그래서 아이들 먹는 거에 집착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홍삼, 유산균, 키 크는 약을 먹이고, 어떻게든 밥을 먹여서 내보내겠다는 일념으로 숟가락을 애들 입으로 열심히 들이밀었다. 엄마가 된 지 5년이 되었지만 나는 겨우 서른다섯 살일 뿐이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정확하게는 마흔이 되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예쁜 내 아이들에게도 잘하고 싶었다. 엄마의 역할도 잘하고 싶고, 왠지 더 나이 들면 못할 것 같은 내 일도 잘하고 싶었다. 그냥 다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다 해치우지 않으면, 내일의 할 일이 또 태풍처럼 몰아쳤다. 극강의 효율성을 발휘했다. 시간대별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정해져 있었고, 그렇게 다 하다 보면 하루가 무심하게 흘러있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빨래 돌리고, 클라이언트에게 시안 컨펌받기를 기다리며 빨래를 갰다. 일주일에 한 번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에 블로그 댓글 달고, 한 달에 한 번 써서 내야 하는 보고서는 몰아서 쓰지 않고 틈틈이 썼다. 애들이랑 놀이터에서 놀면서 온라인으로 장을 보고, 공과금을 냈다. 집에서 일한다는 것은 출근도 퇴근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같이 수다 떨며 기분을 환기시켜 줄 동료도 없었다. 혼자 산책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에 후루룩 밥을 먹으며 점심을 때웠다. 너무 우울하고 답답하면 집 앞 대형 마트에 있는 실내놀이터에 아이들을 넣어두고 매운 라면을 먹는 것이 사치였다. 가끔 여유가 생기면 놀이터에서 책을 읽으며 아이들을 기다렸다.
엄마인 나는 어렸다. 아이들은 너무 작았다. 마흔이 오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져 쉬지 않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았다. 아이들은 전혀 못 느꼈겠지만, 그 시절을 돌아보면 너무나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남편의 삶은 나보다 더 전쟁이었다. 스타트업 대표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은 직원들 눈치 보는 콜센터에 불과했다. 직원이 사무실 화장실에 똥이라도 싸서 변기가 막히면 남편은 변기를 뚫었다. 투자자를 찾아가 투자해 달라고 비굴하게 읍소했다. 비슷한 시기에 창업했던 누군가는 이미 앞서 달리고 있었다. 남편은 누구보다도 일을 열심히 했다. 성실했다. 새벽 한 두 시에 겨우 집에 들어와서는 여섯 시에 나가서 수영을 하고, 회사에 출근하는 일상이었다. 아이 둘을 돌보는 일을 오롯이 내게 맡겨두고 일에만 흠뻑 빠져 있었다. 남편은 체력이 좋았다. 심지어 잘 아프지도 않았다. 그래서 늘 병을 달고 사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항상 바쁜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혼자 애 둘 보고, 살림도 다 하고, 심지어 일까지 하며 돈도 벌며 아등바등 사는데, 그는 나를 게으르다며 탓하기만 바빴다. 애들 먹는 게 부실하다. 집이 늘 지저분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하느라 집안일은 등한시한다 등등. 그와 함께 있다 보면 자꾸 내가 작아졌다.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 대체 그는 나랑 왜 같이 살까. 나는 왜 그의 가시 돋친 말들이 왜 이렇게 아플까. 그렇게 한소리 듣고 나면 일주일 동안 기분이 한껏 내려가 있었다. 나는 밝고 웃음이 많은 사람인데, 남편과 싸우고 난 뒤의 나는 그저 가루가 되어 날리는 나를 겨우 붙잡아야 할 뿐이었다.
내가 크게 아프다한들 남편이 내 병간호는 해줄까. 반대로 남편이 크게 아프면 나는 남편 병간호를 해줄 수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계속해서 뾰족하게 들이밀고 있었다. 스스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나는 그저 잘살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더 외로웠다. 아이들이 옆에 있고, 남편이 있지만 마음이 차가웠다. 서로 어떻게 하면 지지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대방과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주말을 벗어날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적어도 내 기분이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가 함께해서 더 행복한 날을 보내는 것보다는 서로 상처 내지 않아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었다.
그러던 날들의 정신없던 아침이었다. 오늘은 초1이었던 첫째 뮤지컬 발표회 리허설과 발표회가 있었다. 내일은 첫째 생일파티를 태권도 도장에서 하기로 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바빴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해 오늘 오픈할 블로그 포스팅을 정리해 두었다. 애들 어린이집과 학교 가기 전에 주먹밥이라도 해서 먹고 가라고 후다닥 만들었다. TV를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난 아이들 입으로 정신없이 숟가락을 들이밀던 때였다. 갑자기 내 몸에서 쩍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온몸이 굳기 시작했다.
“억. 어... 어어어어 억. 어, 이게 뭐지?”
“엄마,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그래?”
몸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적은 처음이었다. 남은 힘을 다 써서 겨우 온몸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첫째야, 엄마 전화기 좀 가져다줘.”
“엄마? 왜? 어디 아파?”
“어, 엄마 아파. 전화기 빨리 갖고 와.”
“엄마, 여기 있어.”
있는 힘을 다해 출근한 남편에게 겨우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디야? 나 너무 아파. 몸을 못 움직이겠어. 어떻게 해?”
“지금 갈까?”
“올 수 있어? 안 바빠?”
“출근하는 길인데 그래도 가야지. 지금 차 돌리면 30분 안에는 갈 수 있어. 둘째는 어린이집 셔틀 몇 시에 타?”
“8시 20분 차인데, 셔틀 타는 데까지 첫째가 데려다줄 수 있을 거야.”
“알았어. 일단 최대한 빨리 가볼게.”
몸이 억 소리를 내며 못 움직이던 시간은 오전 7시 50분. 눈물이 났다. 이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죽는 건가 싶었다. 남편에게 일단 전화하긴 했지만, 남편이 냉랭하게 미팅이 있어서 안된다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터라 혼자 119라도 불러서 병원 가야 되나 싶었던 터였다. 남편이 진짜 온다고 하니니 갑자기 더 서러웠다. 내가 아픈데도 남편이 와줄까에 대한 확신도 사치처럼 가져야 하는 건가 싶어 미친 듯이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일단 할 일은 해야 했다. 애들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애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입은 움직일 수 있어서 일사불란하게 아이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첫째야, 일단 다 먹었어? 둘째 데리고 양치하고 옷 입고 준비해. 첫째야, 둘째 어린이집 셔틀버스 어디에 타는지 알지? 8시 15분 되면 나가서 어린이집 셔틀버스 타는 거 보고 너는 학교 가면 돼. 알았지? 할 수 있지?”
“응, 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첫째야, 엄마는 너만 믿는다. 고마워. 그리고 엄마가 지금 아파서 병원에 갈 거 같은데 이따가 과천에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셔서 너 뮤지컬 리허설하는데 데려다주실 거야. 알았지?”
“응, 걱정하지 마. 나 할 수 있어. 엄마는 병원 잘 갔다 오고 아프지 말고 있어.”
그렇게 애들이 나가고, 집에는 적막만 흘렀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화장실이 심각하게 가고 싶어졌다.
망했다. 진짜 최대한 참아도 30분 정도밖에 못 참을 것 같았다. 오늘은 왜 이렇게 바빴을까. 30초면 스스로 갈 수 있는 화장실을 참아야 할 정도로 뭐가 그렇게 바빴던 걸까 원망스러웠다. 이미 소변이 차고 넘쳐서 방광을 누르기만 하면 핵미사일처럼 발사될 것만 같았다. 현재의 나는 내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남편이 늦게 오기라도 하면 우리 집 거실에서 오줌 싸고 엎어져 있는 굴욕적인 모습으로 그를 맞이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애 둘 낳으면서 인간의 존엄성 따위 내버려 두고 생존해야 한다는 동물적인 감각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내게는 지킬 것이 많았다.
화장실은 30분 정도 참을 수 있으니 버틴다고 치고, 내 겉모습부터 점검했다. 일단 낡은 파자마 차림. 적어도 벗고 있는 상태는 아니니 통과. 내가 어제저녁에 샤워는 하고 잤던가, 머리에서 냄새는 안 나나. 속옷은 갈아입고 잤던가. 내가 양치는 했던가. 세수는 하고, 눈곱은 뗐던가. 로션이랑 선크림은 발랐던가. 부질없는 고민이다. 변기에 앉을 10초의 시간도 없었던 내가 머리 감고, 샤워하고, 속옷 갈아입고, 제대로 된 잠옷까지 걸쳤을 리 만무하다. 그냥 날것의 인간. 태초의 인간의 상태로 집 밖을 나서야 한다. 그전에 일단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다.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