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어서요.”
“왜 필요 없으신대요?”
“앞으로 안 아플 것 같은데요?”
10년 정도 갖고 있었던 우체국 실비보험을 해지하고 오자 담당자한테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왜 해지했냐고 묻길래, 필요가 없어졌다고 쿨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실비보험이 없으면 큰일 날 것 같던 시기가 있었다. 바야흐로 골골골의 시대. 뭐만 하고 나면 아팠다. 패러글라이딩 배우러 갔던 첫날, 다리 부러져서 누워있는 사람을 보고 겁나서 가입한 실비보험이었다. 그 이후에도 실비보험은 유용했다. 테니스를 배워볼까 싶어서 테니스를 배웠더니 한 달 만에 엘보우가 아팠고, 아이를 낳고 살을 빼볼 요량으로 배웠던 요가가 끝나자 허리통증이 재발했다. 방송댄스를 하고 나면 무릎이 시큰거렸다. 운동만이 아니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일주일을 앓았고, 뜨개질을 하고 나면 목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때 실비보험은 유용했다. 어플로 환급 신청만 하면 되니 거의 공짜로 병원에 다니는 듯 한 기분까지 들었다.
“앞으로 1:1 수업만 하세요.”
디스크가 터지고 좀 걸어 다닐 만 하자 정형외과 의사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1:1 수업이요?”
“네, 본인이 운동하는 법을 전혀 모르네요. 여러 명이 하는 단체 수업을 하다간 더 아플 수만 있어요. 그게 병을 키울 것 같고요. 병원 다니면서 병원비에 돈 쓸 나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 돈으로 예쁜 운동복 사서 운동하세요. 필라테스 같은 운동이 제일 좋을 것 같긴 하네요.”
일 년에 2주 이상은 정형외과 물리치료를 받고, 틈나는 대로 체외충격파와 심하면 물리치료를 겸하며 살아온 인생에 새로운 방향성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 돈 아낀다고 단체 수업을 받은 결과가 병원비구나 싶었다. 한 달에 병원비 50만 원 쓴다고 생각하고, 필라테스 1:1 수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필라테스의 효과는 놀라웠다. 필라테스가 속근육을 키워준다고 하더니 진짜였다. 자세를 교정했고, 약해진 근육을 돕기 위해 옆에 있는 근육을 키우는 운동을 병행했다. 사진을 찍으면 내가 힘든 자세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아챈 필라테스 선생님이 내 허세과 운동을 위해 예쁜 사진도 마음껏 찍어주었다. 그렇게 일상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필라테스를 했을 뿐인데, 병원을 가는 횟수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필라테스를 시작한 지 1년 이후부터는 병원을 한 번도 안 가게 되었다. 살면서 정형외과를 안 가는 날이 있다니. 진짜 신기하기만 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2년이 넘어가니 슬슬 실비보험 나가는 것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내 결심을 실행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던 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우체국으로 갔다.
“실비보험 해지하려고 하는데요?”
“네, 실비보험이요? 신분증 주시겠어요?”
해지는 3분 만에 끝났다. 보험을 해지하고 났더니 해약금도 입금해 준다. 오오, 좋은데? 실비보험 해지하고 필라테스하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우체국 보험 어쩌고저쩌고...”
“네?”
“실비보험 해지하셨죠?”
“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에 슬슬 짜증이 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해지하셨어요?”
왜요? 그게 너님이랑 무슨 상관인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해 얘기했다.
“필요 없어서요.”
“네? 실비보험이 필요 없어요?”
“네, 필요 없는데 왜 해야 해요?”
전 앞으로 꾸준히 운동해서 계속 건강을 유지할 거거든요. 설령 다치더라도 일 년에 60만 원 이하로는 병원비 안 나올 것 같거든요. 건강에 대해 그렇게 자신 있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진짜 운동 열심히 할 거거든요. 실비보험 해지는 돈이 아까운 것도 있지만, 앞으로 운동 열심히 하면서 건강관리하겠다는 결심이기도 하거든요. 남들도 다 있어서 해야 한다는 거 이제 안 하려고요. 돈이 아깝습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예쁜 운동복 사서 더 열심히 운동하는 편을 택하겠어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벌벌 떨면서 걱정하며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아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