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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 imagine Oct 20. 2023

애매한 재능

어릴 때의 나는 내가 무엇이든 잘한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어른들은 내가 피아노도 잘 치고, 그림도 잘 그리고, 머리도 똑똑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린 시절 나의 고민 중 하나는 나는 전부 잘하는 것 같은데 대체 장래희망을 무엇으로 써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피아니스트, 화가, 작가 등 그중에 뭘 골라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피아니스트로 재빨리 써내곤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게 어떤 재능이 있나 하는 고민에 휩싸였다. 내 길이 뭔지 빨리 찾고 싶은 조바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글짓기를 잘하는 줄 알고 학교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가기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서 그림 대회에도 여러 번 나갔더랬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반대표로 체육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수학경시대회, 영어 말하기 대회 등등 초중고 학생이 참가할 수 있는 다양한 대회에 나가봤지만 결론은 변변치 않았다. 수학은 타고난 천재들로 가득했고, 영어는 이미 해외 경험이 풍부한 자들의 것이었다. 글짓기는 타고난 애들과 풍부한 글감을 지닌 아이들의 것이었고, 그림도 그랬다. 체육. 그건 한 번의 반대표로 바로 들통날 만큼 말도 안 되는 영역이었다. ‘내 재능은 참으로 애매하구나’라는 걸 초등학교 때 빠르게 깨달았다. 중학교 때부터는 그냥 공부만 했다.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대기업에 가기 위해, 좋은 연봉을 받기 위해 그렇게 살았다.     


평범으로 일관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은 서른일곱 살쯤 디스크가 터진 것이었다. 그 이후 내 우선순위는 생존으로 바뀌었다. 살기 위해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나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운동을 열심히 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40년쯤 살아보니 건강이 최고였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책 읽고 공부만 한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먹고살 일이 운동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단정 짓고 공부만 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그래서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나처럼 건강의 상실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딸인 첫째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부터 체육 사교육을 시작했다. 태권도, 수영, 승마, 리듬체조, 발레, 방송댄스, 스키 등을 시작으로 아이스하키, 골프를 섭렵했다. 아들인 둘째도 마찬가지였다. 태권도, 수영, 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골프, 스키 등 다양한 운동을 가르쳤다.     


첫째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키가 160cm 되었다. 7년 넘게 운동을 해서 그런지 제법 운동하는 아이의 태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다. 아이스하키협회 선수 등록도 해보고, 전지훈련도 보내 보고, 청소년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여자 아이스하키 대회에도 나갈 정도가 되었다. 아이스하키로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수준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우리 아이는 어떻게 비벼볼 방도도 없구나’라는 걸 기가 질릴 정도로 제대로 느꼈다. 투어프로 출신 선생님께 골프 레슨도 받고, 수도권 인근에서 하는 골프대회에도 두 번 정도 나가봤다. 취미로만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배웠던 골프였던 터라 골프 아카데미에서 치열하게 훈련하는 아이들에 비교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비가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데도 골프 대회는 계속해서 진행되었고, 아이는 전날 급하게 인터넷으로 산 우비를 입고도 비에 홀딱 젖은 채로 골프를 치는데도 너무 재미있다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대회 결과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꼴찌는 겨우 면했다는 점이었다. 다른 엄마들은 5학년 때부터 영어, 수학 학원 알아보고 중학교 선행학습 시키느라 바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행보였다.      


“그 집 첫째는 운동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에이, 아니에요. 공부할 건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시켜요?”

“사교육 시켜보니 운동이 제일 남는 것 같아서요.”

“이제 슬슬 운동 그만하고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 늦으면 힘들어요.”

“공부는 아이가 해야 시키는데, 공부를 안 하는데 어떻게 시켜요. 본인이 급하면 언젠가 하겠죠.”    

 

나는 아이의 진로로 운동을 시킬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운동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초1 때 같은 반 엄마 중 하나는 체대 교수님이었는데 “집이 가장 서서히 망하려면 아이를 운동시키면 돼요.”라고 말해준 것이 인상적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이가 운동을 하게 되면 엄마의 모든 시간이 아이에게 매여있게 되는 점도 싫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고, 그런 점에서 나의 시간을 육아에 전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아이가 하나 더 있었다. 첫째에게 신경 쓰다 보면 둘째는 방치될 것이 분명했다. 

     

아이에게 운동을 열심히 시키는 부모들에게는 몇몇 공통점이 있었다. 아이가 하나이거나, 집에 쌓아둔 돈이 엄청나게 많거나, 엄마아빠 모두가 운동에 푹 빠져 아이들 교육에 전적으로 뛰어드는 케이스였다. 나는 아이가 둘이고, 집에 쌓아둔 돈이 엄청나게 많지도 않으며, 남편은 늘 바빠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식을 운동시키겠다는 것은 오롯이 나 혼자의 힘으로만 해내야 하는 영역이었다. 아이들이 둘 다 아이스하키 대회를 나가면 집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링크장을 일주일에 몇 차례 오가야 했다. 사실 집 근처에 있는 단체 운동을 주 2회 챙기는 것조차도 벅찼다. 주변에 운동시키는 선배 엄마들을 봐도 나와는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진 이들의 얘기였다. 나는 내 땀과 피와 뼈를 갈아서 자식 교육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아이가 진로를 목적으로 운동을 하다가 그만두었을 때를 생각하면 까마득해졌다. 주변에 고2나 고3 때 하던 운동을 그만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졌다. 차라리 운동을 안 했다면 아이나 부모의 좌절감이 이토록 크지는 않았을까. 어떤 성과를 보지 못하고 중간에 어떤 사정으로 인해 멈춰야 할 때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운동을 잘한다 한들 그 끝도 아득했다. 야구 예능프로그램인 최강야구 2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드래프트 장면이 나온다. 라운드를 돌아가며 프로 야구구단에서 유망주를 뽑는 방식이다. 성균관대 원성준 선수가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못 받는 상황이 되자 엄마와 아빠가 아이에게 다가와 오열하며 ‘집으로 가자’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슴 절절하게 아팠다. 온 가족이 15년 가까이 헌신한 운동. 아이뿐만이 아니라 부모도 할 수 있는 모든 열정을 다했을 시간이 주는 먹먹한 아픔이었다. 야구로 유명한 선수 및 감독 코치진과 함께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만큼 야구 잘하는 우리 아이가 프로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그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졌을까. 나는 그런 좌절감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이 조금 달라졌던 건 코타키나발루에서 만났던 수영코치와 골프코치 때문이었다. “첫째는 정말 재능이 있어요. 계속 코타키나발루에 머물게 된다면 수영을 제대로 시켜서 올림픽에 내보내고 싶어요. 훈련 시간은 매일 6시부터 8시까지 2시간입니다. 일요일 하루는 쉬고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가야 한다면 무조건 제대로 된 수영코치부터 구하세요. 무조건 잘할 아이예요.” “아이에게 골프 재능이 있네요.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빨리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실력을 키워보면 좋겠어요. 제 친구가 한국 경기도 용인에 있는 00 골프 아카데미를 운영하는데, 근처에 있다면 한번 가서 상담받아보시면 좋겠어요. 호주에는 00 골프라고 있는데, 여기도 정말 잘 가르치는 곳이에요.” 두 선생님들의 열렬한 구애는 나를 갸웃하게 했다. ‘으응? 우리 첫째에게 진짜 재능이 있는 건가.’ 싶었던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아이에 대한 칭찬이 나를 흔들리게 했다. 만약에 아이에게 진짜 재능이 있는 거라면 지금 해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설령 아이에게 재능이 없을지라도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오랜 고민 끝에 남양주에 있는 00 골프 아카데미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아이의 스윙을 지켜보던 프로님은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아이가 다른 선수에 비해서 말랐는데, 그런데도 임팩트가 있어서 때리는 재능은 확실히 있네요. 옛날 스윙법으로 하고 있는데도 거리도 잘 나가고요. 그런데 골프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잘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닙니다. 연습과 노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힘들어요. 만약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엄청 힘들 거예요. 중학교에서 1교시만 하고 와서 밤까지 계속 연습해야 하고요. 고등학교는 방송통신고등학교 다니면서 아예 안 가고 연습만 하고요. 그걸 버틸 수 있어야 합니다.”     


운동은 타고난 운동신경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별한 사람들의 영역이라고만 여겼었다. 아이의 진로상담을 위해 찾은 골프 아카데미에서 들은 얘기는 성실함과 집중력의 영역이었다. 낯설었다.      

지금껏 나는 내가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는 엄청난 글 쓰는 재능은 없지만, 매일매일 마감을 충실하게 지킬 수 있는 적당히 읽기 편안하고 쉬운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은 갖고 있다고 여겼다. 여행사 경력 4년을 밑천 삼아 10년 넘게 해외관광청과 관공서 등에서 일할 수 있었다. 아이를 직접 돌보며 일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사무실 출근을 제외하고는 성실하게 재택근무를 하며 집에서 글을 썼다.      


‘이렇게 애매한 재능을 가지고도 계속 써도 되나?’라는 질문은 10년 동안 나를 괴롭혔다. ‘누군가 돈 주는 사람이 있으면, 재능이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날의 고민은 접고 하루하루 마감에 집중했다. ‘돈을 받고 일하면 프로다.’라는 김성근 감독의 말에 공감되었다. 처음에는 말 못 하는 아가와 하루종일 보내는 육아가 너무 싫어서 뭔가 몰두할 일이 필요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늘 바쁜 남편에게 마음 둘 곳이 없어서 한 일이었다. 한 달에 생활비 돈 백만 원이라도 벌 수 있는 수입원이 필요해서 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했다. 쓰기 싫어도 썼고, 정서에 안 맞는 글이어도 썼다. 그렇게 10년을 하고 나니 남의 이름으로 글 쓰는 일이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이제 내 이름을 걸고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에 하고 있던 일을 그만둔 지 벌써 2년이 다되어 간다.      


내 꿈을 찾겠다며 보낸 2년 동안 책 쓰기 워크숍도 들어보고, 100페이지가 넘는 초고도 썼다. 출판사에 출판기획안도 넘겨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했다. 시간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라는 것. 그때마다 재능의 벽에 부딪혔다. 10년 넘게 글을 써도 내게는 작가로서의 재능이 없구나. 남들보다 싸고, 빠르게 글을 쓸 애매한 재능만 있다고 여겨졌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책을 읽었는데도 답이 없나 싶었다. 에라, 이럴 거면 그냥 다 때려치우자. 하루종일 누워서 넷플릭스만 보기도 하고, 야금야금 술만 마시기도 하고, 아이들 운동하는데 가만히 앉아서 멍 때리며 지켜보기도 했다.     

 

내 재능에 대해 회의감으로 무기력해 있을 때 아이스하키를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재밌었다. 그래서 그냥 했다. 필라테스 선생님이 주 2회에서 주 3회로 바꾸자고 했다. 생각보다 할만했다. 그래서 그냥 했다. 수영을 배웠다. 사실 호흡이 힘들어서 죽을 것 같지만 자유형 팔 돌리기가 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나는 재능과 상관없이 쓰는 사람이었다. 누가 보는지와는 별개로 쓰는 사람이었다. 나 혼자만 읽는지, 가족이 읽는지, 온라인 독자가 읽는지, 출판사 직원만 읽고 마는지는 별개였다. 살려고 시작한 운동에서 내가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골골골 인생에서 ‘못 먹어도 고!’를 외칠 수 있는 대담함이 생겼다. 그냥 한번 부딪혀보자. 그건 아마도 실금처럼 아로새겨진 내 11자 복근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건 어쩌면 ‘아, 모르겠다’ 정신과 ‘이걸로 되겠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1년 내내 공들여 썼던 초고는 출판사에 많이 까이기도 했고, 나 스스로도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 내가 책 쓰고 싶다는 욕심에 이렇게까지 해서 가족 얘기를 팔아야 하나 겁이 났다. 내가 이렇게 썼다고 해서 남편과 시부모님이 오해하면 어떡하지. 내가 이렇게 써서 아이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열심히 남편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걱정 인형의 굴레에 쌓여 있던 내가 쓸 수 있었던 글은 위인전 같은 남편의 사업을 찬양하는 글이었고, 그걸 깨닫고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겁쟁이. 그동안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하고 살았으면서,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글쓰기마저 포기하려고 했던 나를 위해 쓴다. 살기 위해 운동하면서 알았다. 살고 싶다면 계속해서 써야만 한다고 말이다. 내년에는 착실하게 쌓아 올린 근육들이 가장 효과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자세를 열심히 연습해서 필라테스 사진을 한 장 남겨야겠다. 그리고 옆에는 내 이름으로 된 책도 한 권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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