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친구의 별명은 ‘똘똘이’였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은 큰 눈을 똘망똘망 뜨고 야무지게 말하는 친구의 별명을 그렇게 붙여줬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또래 친구들과 싸우는 법도 없었다. 공부도 곧잘 했고, 가끔 악바리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사고 치는 일 없이 무난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 보이는 모습은 이랬지만, 집에서는 좀 다른 모습이라고 했다. 이건 세월이 지나서 친구 입을 통해 전해 들었다.
바로 밑 여동생과는 자주 투닥거렸다고 했다. 말다툼은 기본이고 동생한테 머리카락도 자주 뽑혔다고 했다. 친구는 마른 편이고 힘이 약해서 동생과의 싸움에서는 대부분 패했다. 혈투가 벌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집으로 돌아갈 때면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오지 않는 엄마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친구의 형제 관계는 아래로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이므로 맏이를 챙기는 일은 종종 소외될 때가 있었다.
친구는 5월 햇살 쏟아지는 날에 믿음직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아들 둘을 낳고 산후 우울증으로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잘 이겨내면서 직장에서 인정받는 워킹맘이 되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는 둥, 먹고살기 바쁘다는 둥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친구와 나는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450 km 떨어진 물리적 거리를 핑계대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세월을 끼니 삼아 꼬박꼬박 나이를 먹었다.
친구 남편은 직장 문제로 베트남에 가게 되었다. 친구는 남편이 떠난 후 1년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다행히 직장에는 휴직 신청을 할 수 있었으나 선뜻 남편을 따라나서기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발목을 잡았다. 아이들의 학교 문제가 있었고, 베트남에 있는 동안 한국 집을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었고, 회사로 복직했을 때 뒤처지지 않고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물론 낯선 나라의 환경과 기후에 적응해서 잘 지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그러던 친구는 고등학생인 큰아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초등학생인 작은아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현실적인 문제를 뒤로하고 그래도 남편과는 같이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 듯했다. 베트남에서 만난 친구는 흡사 현지인같이 적응된 모습이었다. 하노이 시내를 여기저기 안내할 때는 가이드 같기도 했다. 처음 온 친구에게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많이 먹이기 위해 친구는 바빴다.
먼지 풀풀 난다며 마스크를 쓴 채 인력거 투어를 했고, 땀에 흠뻑 젖은 채 항 무아(Hang Mua) 계단을 올랐다. 몇 번이나 타 본 보트를 꾸벅꾸벅 졸면서 타기도 했으며, 냉방도 안 되는 비좁은 밧짱(Bat Trang) 골목을 걷기도 했다. 빈틈없이 짜여진 관광과 쇼핑 스케줄로 친구와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 쓰러져서 금방 잠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친구의 소녀 모습부터 어른이라고 부르는 지금 모습까지 기억하는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아는 척해야 하는 어른의 나이가 됐지만, 가끔은 어른이라는 무거운 옷을 벗고 어린아이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오래된 친구와 여행한다는 것은 순수하고 때로는 치열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일 같다.
먼지 낀 기억을 탈탈 털어내니 묻혀 있던 추억이 하나둘씩 풀썩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