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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송 Mar 18. 2021

왕가위가 다루는 <고독>.

중경삼림(1994)

  

  왕가위 감독은 <영웅본색>을 연출한 오우삼 감독과 함께 홍콩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가 가진 화려한 미장센과 낭만적인 음악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매력을 지녔다. 내가 오늘 다룰 <중경삼림>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했던 당시에 왕가위 감독에 향한 뜨거운 반응을 결정적으로 이끌어낸 작품이었다고 한다. <중경삼림>의 큰 호평으로 왕가위 감독의 전작들이 한국에서 다시 개봉되기도 했으며, 한동안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흉내 낸듯한 아류작들이 한국에 쏟아지기도 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왕가위 감독은 <중경삼림>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해피 투게더>라는 이름으로 개봉한 <춘광사설>, 장만옥과 양조위의 절제된 사랑이 돋보이는 <화양연화>를 연달아 선보이며 스스로의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형성해나갔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감상하다 보면, 인물들이 겪는 '고독'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독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의 고독은, 인물들이 갖는 감정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왕가위 감독이 전달하려는 주제와 플롯, 영화를 이루는 전반적인 분위기에까지 고독은 깊게 관여하고 있다. <중경삼림>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경찰 223과 663이 이전에 사귀던 애인을 잊기 위해 취하는 태도는 고독에서부터 출발한다. 밤에도 선글라스로 감정을 숨기는 금발머리의 마약 밀매상에게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중경삼림> 밖에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고독에서 시작하고, 고독을 겪고, 고독을 극복하는 인물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은 '고독'이라는 감정을 인물들에게 극을 전개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 작중에서 사랑을 하는 이들의 다양한 결말을 이끌어내는 요소로써 활용한다.

  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중경삼림>은 경찰 223과 금발머리의 마약 밀매상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메이'라는 이름의 애인과 이별하게 된 경찰 223은 외로움에 거리를 방황한다. 경찰 223은 자신을 통조림에 비유하며 유통기한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먹어치우며 자신을 떠난 메이를 향한 분노를 쏟아냄과 동시에 계속해서 변하는 사랑에 대해 고뇌에 빠지면서, 사랑의 유통기한을 만 년으로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동료들의 배신으로 계획이 엉망이 된 마약 밀매상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경찰 223과 잔을 들이켠다. 갈 곳을 잃게 된 두 인물은 영업시간이 끝난 술집에서 벗어나 호텔에서 고독을 함께 한다. 잠에 든 마약 밀매상을 뒤로 경찰 223이 무언가를 먹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술집에서 경찰 223의 어깨에 기대던 마약 밀매상은 정작 외로워하는 그와 함께 할 여유는 없는 것처럼 보이고, 통조림을 먹었던 이전처럼 경찰 223은 외로움을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호텔에서 먼저 나온 경찰 223은 비가 오는 운동장에서 질주하며 자신의 생일을 맞이한다. 그러나, 경찰 223이 그 누구의 축하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낙담한 순간에 마약 밀매상으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저 찰나의 인연이었으나, 마약 밀매상과 경찰 223은 찰나 이상의 유대를 갖게 된 것이다.

  <중경삼림>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경찰 663이 그리워하는 전 애인의 직업이 스튜어디스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스튜어디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중경삼림>에서 고독이 어떻게 활용될지를 예상해볼 수 있다. 극 중에서 경찰 663의 주위를 맴도는 인물이 있다. 경찰 663이 찾는 단골집의 점원인 페이는 그를 향해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인물이다. 순찰구역이 바뀐 경찰 663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가게에 늦게 들어가려는 그녀의 태도는 경찰 663과 사귀었던 스튜어디스의 태도와 대비된다. 스튜어디스가 경찰 663과 헤어진 뒤, 우연히 가게에서 두 사람이 재회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을 잊으려고 노력했던 경찰 663을 태연하게 반가워하던 스튜어디스는 음료의 계산을 그에게 맡기며 또다시 유유히 떠나버린다. 그에 반해 가게에서 경찰 663을 기다리던 페이는 그의 집까지 드나들게 된다. 이후, 가게를 운영하게 된 경찰 663을 찾아온 페이가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온다는 점도 흥미롭다. 기다리는 역할로 뒤바뀐 경찰 663과, '떠나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스튜어디스라는 역할이 페이를 통해 '돌아오는 사람', 혹은'함께 떠날 수도 있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이 두 인물의 감정선을 고독에서부터 새로운 관계로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중경삼림>이 다루는 두 에피소드에서는 공항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표현된다. 마약 밀매상이 곤경에 처하게 된 장소가 공항이었고, 경찰 663이 사랑하게 되는 두 명의 여성도 스튜어디스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중경삼림>에서 표현되는 이별과 만남은 공항이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4명의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왕가위 감독은 이별에 구속받고 만남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는 인물들을 통해 고독을 관통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고독을 겪는 이들로 외로움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영화들은 그 자체로 홍콩영화를 찬란하게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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