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동아리 여름 방학을 마무리하고 각자 읽은 세계문학을 소개하며 발제한 것들을 이야기나누기로 한다. 내가 소개한 헤르만 헤세 작품 <<황야의 이리>>는 편집자 서문을 도입부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쉰 살 가까운 사내 하리는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라고 불렀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보며 책에 밑줄 긋기를 한 부분은 <자살자들>에 관한 헤세의 관찰력이다. 헤세는 주인공 하리를 내세워 기한을 정해 놓은 자살자로 기획했지만 그것마저도 가능하지 않았다.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한 문장은 이렇다.
<자살자>는 개성화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다시 말하자면 인생의 목적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완성과 실현에 있지 않고, 자신의 해체, 즉 어머니에게로, 신에게로, 전체에게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로 자살을 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살이 죄악임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자살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에서가 아니라 죽음에서 구원을 보며, 자기 자신을 바치고, 내던지고, 지워버리고, 시원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강점이 또한 약점이 될 수 있듯이(아니 사실 강점이 곧장 약점이 되는 때도 많다), 전형적인 자살자는 거꾸로 그의 약점으로 보이는 것을 강점이나 버팀목으로 삼는다. 그런 일은 무척 흔하다.
-황야의 이리/ 70쪽
헤세는 세계의 미래, 지금을 여전히 비판하고 있다. 시대의 주류에게 날 선 그의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가 왜 지금의 내 손에까지 들려졌는지에 대해 궁금할 이유도 없다. 헤세는 조금이라도 변할 세계를 열망했지만 세계는 그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여기. 이 나라에서 정치를 한다는 인간들이 이 책을 읽어 보았을까. 그들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책을 읽어야 할 시간이다.
황야는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이다. 이리 또한 그렇다. 영상이든 동물도감이든 나는 황야의 이리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황야의 이리는 내게 문명 세계와는 다르다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한국 문화, 내가 사는 이곳에 존재하는 일정한 생활 습관의 영향이다. 그 일정한 생활 습관에 조금 비껴 나 있다고 생각하는 내 일상처럼 개인에게 놓인 사회 문화는 나를 조정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사회적 독서 모임을 통해 그런 나쁜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는 중이다.
지역 사회라는 과거와 현재가 병행하는 장소에서 살고 있지만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변한 게 별로 없다. 살아오면서 쌓인 생각이라는 틀을 깨부수는 일은 자기 삶을 부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은 그것대로 개인이 쓴 역사다. 그렇기에 공동체에서 개인이 만들어 가는 하루는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
공유하지 못하는 기록이라 할지라도 나를 위한 첫 줄은 언제나 가능하다. SNS에 쌓아둔 데이터를 찾아본다면 나는 잊어도 흩어진 기록들이 또 다른 나를 이룰 수 있다. 디지털 시대를 벗어나 살고 있어도 사회 관계망을 외면하기는 어렵다.
지역진흥을 위한 예술재단에 가을 공모사업을 진행하려고 준비 중인데 쌓인 데이터가 부족하다. 뭐든 밖으로 드러날 노력을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주은 씨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주은 씨를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잘 되기를 바라지만 결과는 내 몫은 아니니까 과정에 집중하는 중이다. 동네 책방을 위한 사업을 보면서 책방 생존기는 역시나 나만에 문제는 아니지 싶다.
여름 잘 보내기 좋은 책방으로 변신한 공간에서 여러 일들을 기획하고 머리를 맞대는 중이다. 조금 더 깊이 읽기 모임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라서 더 든든한 동네 책방을 지키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