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께서 급성뇌경색과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주말이면 어딘가로 여행 다니던 우리 부부의 일상은 한동안 되돌아오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4년차에 접어든 지금은 우리 대신 딸이나 아들이 할머니곁에 있을 수 있다면 조금 먼 곳도 다녀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답니다.
3월 중순에 친정부모님 모시고 경주로 여행 가기 전, 답사차 남편과 먼저 경주를 다녀왔어요. 그 동안엔 가까이 사는 딸이 할머니를 들여다보기로 해서, 딸 믿고 그리 할 수 있었지요.
마침 황리단길의 감성숙소를 체험단으로 제공받아 하루 숙박까지 하며 잘 다녀왔는데, 집에 들어선 순간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감지되었습니다.
온집안에 싸한 연기냄새가 느껴지더라구요.
"어머님, 혹시 뭐 태우셨어요?"
"니 코에 그게 맡아지냐? 내가 환기를 시킨다고 싹 다 시켰는디도 냄시가 나부네~. 아침에 주전자에 물 끓이다가 홀랑 태워묵었다야.
내 평생 행주 하나도 삶다가 태운 역사가 없는디 나이 든께 빙신이 다 돼부렀당께. 그 많은 주전자 물이 다 쫄아서 주전자가 새까맣게 타도록 몰랐어야. 수세미로 주전자를 닦다 닦다 어깨가 아파서 도저히 더는 못 닦겠어서 버려불고 새 주전자 꺼내놨다."
"아이구, 어머님 어디 안 다치셨어요?"
"잉, 어디 다친 데는 없다. 멀쩡한 주전자만 태워묵었재."
"아유~ 어머님 다치신 데 없으시고 집에 불 안 났으니 다행이에요. 그 주전자 오래 써서 버려도 돼요. 저 결혼하면서 산 주전자니까, 25년 잘 썼네요."
"그래? 그람 본점 뽑았구만. ㅎㅎ 이것도 완전 새거는 아니고 내가 전에 서울에서부텀 쓰던 주전자여. 스뎅이라 잘 닦아서 놔둔께 완전 새것같지야?"
"이야~ 진짜 새 주전자 같아요. 이 주전자가 자기도 쓸모있고 싶은디 구닥다리 주전자가 자리 꿰차고 있은께 홀랑 태워버렸나 봐요."
"그랑께~ 그랬는지도 모르겄다잉. 새로 주전자를 사야쓰까 어짜까 하고 있다가, 생각해봉께 서울에서 내려올 때 내가 쓰던 주전자를 잘 가져와서 넣어두었던 게 기억나서 뒤져봉께 이라고 멀쩡한 것이 나오더란마다."
"완전 새거 같아요. 상태 좋네요~"
"그라지야? 스뎅은 반짝반짝 잘 닦아서 놓기만 하믄 백날 가도 새거 같아야. 내가 서울서 살 때 샀던 건께 아무리 못해도 20년은 넘은 것인디 이라고 좋다~"
"어머님이 살림의 여왕이시라 관리를 잘 하셔서 그렇죠. 어디 주전자뿐이에요? 고기 궈먹는 냄비도 여적 멀쩡하잖아요."
"그란디 내가 이 주전자 꺼내면서 혼자 막 웃었다."
"왜요?"
"주전자를 쓸라고 봉께 그 안에 서울에서 쓰던 물건들이 한가득 들어있는디 별게 다 있드랑께. 한 번 볼래?"
하시곤 어머님께서는 신이 나셔서 주전자에서 꺼내둔 물건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셨어요.
채칼, 감자칼, 과도, 국자, 뒤집개, 수세미, 숟가락,국물낼 때 쓰는 면보랑 주머니가 종류별로 쫘르르~
이미 찬장에 들어간 물건들은 빼고 찍음
"내가 뭐할라고 이런 것을 하나도 안 버리고 주전자 안에 넣어놨어야. 대전 내려가면 쓸지 모르겄다 하고는 이렇게 하나도 안 버리고 주전자 안에 차곡차곡 담아놨드랑께."
어머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국물내기용 주머니
"이야~ 이게 다 그 안에 들어있었어요? 주전자가 그동안 애네들 다 품고 있느라 답답했겠네요. 그러니 헌주전자 빨리 없어져야 지 차례 올 거라, 오늘 아침에 어머님 혼 쏙 빼놓고 태워버렸나 봐요~"
"그랑께~ 그란단마다. 옛말에 사람 손 탄 물건 오래 두면 도깨비 되고 귀신 된단 말 있는디 딱 그짝이여. 내가 80 가까이 살아오면서도 한 번을 뭐 태운 역사가 없는디, 이라고 큰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아놓고 불도 쬐깐하게 틀어두었는디도 홀랑 태워묵은 거 보믄 뭐가 씌워도 단단히 씌웠어야."
그리하여 우리집에선 2024년 3월 11일을 기점으로 주전자의 세대교체가 자연스레 진행되었답니다.
이번에 새까맣게 몸을 태워 소신공양을 한 주전자로 말할 것 같으면~ 결혼준비하면서 친정엄마랑 함께 남대문 그릇가게 돌아다니다가, 엄마가 이 주전자를 이리저리 돌려보시고는,
"아나~ 여기에다가는 물 끓여먹어라 잉?"
하시며 사주신 물건이라 제게도 나름 애정이 깊은 물건이었지만, 기왕 태워버린 주전자를 어떻게 복구할 길도 없고, 거기에다 대고 시어머님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기왕 이리 된 거 기분좋게 새 주전자를 받아들이기로 했지요.(그래도 차마 그 주전자를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 닦아서 보관이라도 해볼까 싶어 주방 베란다 한쪽에 얌전히 두었더랍니다. 그런데 재활용 쓰레기 버리는 날 유난히 부지런하신 시어머님께서 그 주전자부터 들어다가 버려버리시더군요. ㅜㅜ)
암튼 이렇게 해서 새로 더 좋은 주전자를 꺼내었다 하드래도 마음 한곳이 조마조마하셨을 시어머님이 어느새 평소처럼 당당해지셨어요.
저도 추억과 애정이 깃든 주전자를 버려야 하는 일이 몹시 안타깝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더 좋은 주전자에 물을 끓이게 되었으니 좋은 점도 있고요.
시어머님과 살 때는 때로 이런 기지가 필요하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 시어머니 좋고 며느리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