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만난 소매치기

빈손으로 시작한 내향적 3인가족의 열흘간 파리자유여행기

by 전민재
런던의 saint pancras 역

파리로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 딸아이의 버킷리스트에는 영국 런던이 있었다. ‘찰리와 롤라’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해리포터를 원서로 모조리 읽고 또 읽던 시기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행 셋째 날에 파리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을 하루 만에 다녀오는 계획을 세웠다. 파업으로 유로스타가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다려보기로 했고 다행히 우리가 예약한 차편은 원래대로 운행을 할 모양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5시 30분에 볼트를 호출해서 택시를 타고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파리 북역은 우범지역이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걱정이 많았으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Paul이라는 빵집에서 빵을 사서 6시 30분에 프랑스 출국, 영국 입국 심사를 완료했고 7시 43분 기차가 출발했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 KTX를 타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9시에 영국 런던의 Saint Pancras역에 도착했다. 해리포터를 본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역으로 출발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 국회의사당, 빅벤, 런던아이를 눈으로 확인했다. 비가 와서 우산을 쓰다가 모자를 쓰다가를 반복했다. 런던 사람들도 역시 파리 사람들처럼 비를 그냥 맞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사건은 지하철역에서 발생했다.



줄을 서있는데 우리 앞에 줄을 서 있던 서너 명의 사람들이 우리가 옆칸 줄로 가자 자기들도 같이 따라왔다. 우리가 다시 원래 줄로 돌아오자 크게 웃으면서 자기들도 따라오더니 우리 앞에 끼어들면서 지하철을 탔다. 나와 남편 앞을 가로막고는 지하철 안쪽으로 더 이상 못 들어가게 의도적으로 막는 듯한 행동을 계속했다. 일행 중 머리카락이 전혀 없는 민머리의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손을 머리 뒤쪽으로 깍지 낀 자세로 은근슬쩍 남편을 막고 서 있었다. 나와 남편이 안쪽 자리로 들어가지 못하게 벽을 치는 것 같았다. 딸아이와 남편을 서로 갈라놓고는 불안해진 우리가 딸아이에게 다가가는 것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마치 유쾌한 한 편의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질 좋아 보이는 가죽점퍼를 입고 밝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뭔가를 자기들끼리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는 와중에 당한 일이라 우리는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었다. 민감한 편인 내가 한국말로 남편에게 조용히 말했다.


“저 사람들 이상해. 우리가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는 것 같아. 그리고 아까 우리가 타는 쪽으로 계속 따라서 이동했어.”


남편은 그런 내 말에 대해 그 남자가 굉장히 좋은 시계를 차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면서 별일 아닌 걸로 치부했다. 당신은 너무 소설을 쓰는 경향이 있다면서. 몸싸움 끝에 그들은 바로 다음 정거장에서 사라졌다.



셋이 겨우 만난 뒤 확인해 보니 앞으로 매고 있던 남편의 슬링백이 반쯤 열려 있었다. 어느 순간에 가방에 손을 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행히 여권도 안쪽주머니에 지퍼로 잠겨있었고 귀중품은 없었기에 별 일없이 지나갔다. 하마터면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다. 그 칸에 동양인이 우리뿐이어서 쉽게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딸아이 얘기로는 키가 작은 자기를 위에서 슬쩍 내리누르며 압박했다고 했다. 이렇게나 고도로 계획되고 단련된 상황연출이라니. 소매치기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파리가 아닌 런던에서 소매치기를 만나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딸아이는 꽤 인상적인 경험이었는지 나중에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다른 예술가들을 흉내 내며 각자 그림을 그릴 때 이날의 사건을 만화로 그렸다.



이름 모를 새들과 청설모가 귀여운 세인트 제임스 공원을 지나 버킹엄 궁전에 도착했다. 근위병 교대식은 요일(월/수/금/일 진행)이 맞지 않아 보지 못했지만 말 타는 경찰과 근위병들을 보았다. 코벤트 가든에 있는 플랫아이언에서 식사 후 타워 브리지와 런던 브리지를 보기 위해 버스를 탔지만 런던 역시 교통 파업으로 버스 운행이 중단되기를 2번이나 겪었다. 다시 역으로 돌아와 유로스타를 타려고 했을 때도 파업여파로 탑승해야 할 기차의 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여행오기 전부터 파업으로 예매한 유로스타 티켓을 날리고 런던을 왕복할 수 없을까 봐 노심초사했기에 그 정도의 변동사항만이 발생한 것이 너무 감사했다.



하루 동안 다녀올 계획이었던 런던을 떠나오기가 싫었던 것은 참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언어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런던 사람들이 친절하고 너그럽게 느껴졌다. 20년 전에는 런던이 이민자들의 시위로 갈등이 심각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그 반대 같아 보였다. 파리는 무질서하지만 다채롭고, 아름답지만 지저분한 그런 곳이었다면 런던은 정돈된 가지런함과 세련된 멋이 있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어떤 시스템이 있고 그것이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그래서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두 도시의 공통점이라면 도시의 각 구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종, 표정, 옷차림, 제스처 같은 것들이 너무 극과 극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씁쓸하면서도 우리가 이곳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같은 것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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