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를 개인에게 적용
매년 <트렌드코리아>를 챙겨보면서 다음해의 트렌드에 대해서 상상해 보곤 한다. 책의 내용 중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이 눈에 들어왔다. 글로벌 팬데믹 위기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수면위로 드러나게 만들었지만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기존 산업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산업이 부상할 기회를 얻고 기업에서는 미루던 혁신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로나 19는 산업구조의 재편을 좀 더 급진적이고 필연적으로 만든 결정적인 외생 변수가 되었다고 했다.
이 개념을 암과 나와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유방암이야 말로 나라는 사람의 약한 부분이 수면위로 드러나게 해서 나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암은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삶의 양식과 고수하던 자아의 패턴에서 새로운 양식으로 나아가다가 불안과 두려움, 무기력으로 인해 주춤하며 혼란에 빠져있을 때, 내 단조로운 일상에 균열을 내어 파괴함으로써 좀 더 급진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도록 용기를 내라고 내 등을 떠미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힘든 위기의 순간이 가장 변화하기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암생존자, 암경험자라는 나의 새로운 정체성은 내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며 내가 나의 본질대로 나의 우주를 만들어가며 사는 삶을 나중으로 미루는 습관을 유지할 수 없게 함으로써 무엇이든 실행하도록 독려했다. 내가 우유부단하게 활짝 펼쳐놓은 해보고 싶은 일들의 리스트를 재정비하여 압축시키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자신감을 불어넣으려고 애쓰기보다 자신감이 부족한 상태로 하고 싶던 일을 시도해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묵직하고 현실적인 고민과 거침없이 나아가야할 명분이 되어 주었다. ‘아님말고’ 정신을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 것 같다. 빨리 겪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임을 내게 알려주었다. 암까지 걸렸는데 뭔들 못하겠냐는 이판사판 정신을 실행으로 옮겨보도록 용기를 주었다.
책에 나오는 ‘거침없는 피봇팅’이라는 개념이 앞으로 내가 활용해봐야할 실천지침이라고 생각한다. 피봇팅은 기업이 자사가 보유한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소비자의 변화무쌍한 니즈에 맞추며 사업을 신속하게 전환하는 전략이다. 다양한 가설을 세우고 계속 테스트해나가면서 방향성을 상시적으로 수정해나가는 과정이다.
나도 암을 경험한 후 나 자신의 자원을 활용해 피봇팅을 하고자 한다. 대중 앞에 나서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접점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보고 내가 원하는 세계를 확장해나가는 즐거움을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아직은 건강상태가 안정적이지는 못하니 꼭 일을 통한 성취뿐만 아니라 취미활동이나 종교생활 등 그동안 내가 효율성과 생산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시도해보지 못하고 미루어왔던 것들에 대한 도전도 해 볼 생각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내 몸과 마음을 살뜰히 챙겨가면서 시작하려고 한다. 내게 열리는 문이 있다면 망설이기보다는 일단 들어가 보겠다고 결심을 했다.
융은 우울보다는 불안은 선택하라고 말했다. 암이 내게 주는 메시지는 안전과 평온함을 유지하고자 고여 있지 말라는 것이었다. 있던 자리에 정박한 배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불안하더라도 낯선 것을 시도해보고 거기서 영혼의 떨림과 설레임을 경험해보라는 격려였다. 내가 타고난 대로, 생긴 대로 사는 것에 주저함이 없이 용기를 내보라는 응원이었다.
니체의 말에 용기를 내 본다.
“당신을 죽이지 못한 것들은 당신을 강하게 만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