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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속도가 삼킨 깊이

속도는 도구다

by jeromeNa

코드를 짜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에러 하나를 잡는 데 반나절이 걸리기도 했다. 구글에 에러 메시지를 복사해 붙여 넣고, 스택오버플로우 답변들을 하나씩 읽었다. 어떤 답변은 틀렸고, 어떤 답변은 내 상황과 미묘하게 달랐다. 그 차이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코드가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게 됐다.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 코드가 내 것이 됐다.


요즘은 다르다. AI에게 원하는 걸 말하면 코드가 나온다. 몇 분이면 동작하는 결과물이 만들어진다. 바쁜 일정 속에서 효율적이다. 코드를 일일이 짤 시간은 없지만, 돌아가는 결과물은 필요하다. 코드를 받아 실행하면 '만든' 느낌이 든다.


그런데 정말 만든 걸까. AI는 결과물을 건네주지만, 그 코드가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는 건네주지 못한다. 어떤 선택지들 사이에서 왜 이 방식이 더 나은지, 이 구조가 어떤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지, 코드 한 줄에 담긴 설계 의도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자동 생성되지 않는다.


결과물을 갖고 있다는 것과 코드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르다. 하지만 그 차이를 느낄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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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 그렇다.


앨범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일이 드물어졌다. 플레이리스트에서 한 곡씩 듣는다. 마음에 들면 저장하고, 아니면 다음 곡으로 넘긴다. 15초 안에 판단이 끝난다. 인트로가 길면 지루해서 스킵한다.


앨범이라는 형식이 있었다. 수록곡의 순서에 의미가 있었고, 첫 곡에서 마지막 곡까지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어떤 앨범은 전체를 들어야 비로소 이해되는 곡이 있었다. 앞의 곡들이 쌓아온 감정 위에서 그 곡이 울렸다.


지금은 그 흐름을 경험하기 어렵다. 알고리즘이 곡을 섞어서 들려주고, 우리는 조각조각 소비한다. 개별 곡은 알지만 앨범은 모른다.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한다.




대화도 빨라졌다.


메시지는 짧아지고, 답장은 빨라졌다. 긴 문장을 쓰면 읽기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요점만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회의에서도 "결론부터 말씀해 주세요"가 미덕이 되었다.


효율적인 소통이다. 시간을 아끼고, 핵심을 전달하고, 빠르게 의사결정을 한다. 비즈니스에서는 필요하다. 모든 대화를 느긋하게 나눌 여유는 없다.


하지만 결론만 오가는 대화에서 빠지는 것이 있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고민, 망설임, 다른 가능성에 대한 검토. "A가 좋겠습니다"라는 결론 뒤에는 "B와 C도 고려했지만 이런 이유로 A를 선택했습니다"라는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이 생략되면 결론만 덩그러니 남는다.


과정을 모르면 결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어떤 조건에서 그 결론이 유효한지, 상황이 바뀌면 결론도 바뀔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은 과정 안에 들어 있다.




속도는 표면을 넓힌다. 깊이는 한 곳을 판다.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접한다. 더 많은 책 제목을 알고, 더 많은 음악을 듣고,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된다. 범위가 넓어졌다. 과거에는 접근조차 어려웠던 정보와 콘텐츠가 손끝에 있다.


하지만 하나에 머무는 시간은 줄었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아졌다. 알고 있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겉만 핥은 것들이 쌓인다. 넓지만 얕은 앎.


깊이란 무엇일까. 시간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이다. 같은 것을 반복해서 보고, 읽고, 생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단순해 보이던 것이 복잡해지고, 알았다고 생각한 것이 새로워지는 경험. 그것이 깊이다.


깊이는 속도와 양립하기 어렵다. 빨리 가면서 깊이 갈 수는 없다. 많이 보면서 하나를 오래 볼 수는 없다. 선택의 문제다.




문제는 선택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속도에 보상을 준다. 빨리 읽는 사람, 빨리 판단하는 사람, 빨리 결과를 내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느린 것은 비효율로 여겨지고, 오래 걸리는 것은 능력 부족으로 해석되기 쉽다.


"아직도 그거 하고 있어?" 이 질문에는 은근한 압박이 있다. 하나에 오래 매달리는 것이 답답해 보인다. 빨리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깊이 파는 것보다 넓게 훑는 것이 효율적으로 보인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분기마다 성과를 내야 하고, 빠른 사이클로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프로젝트,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 탐구는 정당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언제 결과가 나와요?"라는 질문 앞에서 깊이는 위축된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그 사람을 보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침묵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


빠른 판단은 이 과정을 생략한다. 첫인상으로, 프로필로, 몇 번의 대화로 사람을 파악했다고 느낀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파악한 것은 그 사람의 표면이다. 표면 아래 있는 것—상처, 두려움, 소망, 모순—은 시간을 들여야만 보인다.


깊은 관계는 느린 관계다. 빨리 친해지는 것과 깊이 아는 것은 다르다. 빨리 친해진 사이가 쉽게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표면에서 맞았을 뿐, 깊은 곳에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빨리 답할 수 있을까. 자기소개서에 쓸 수 있는 것들—학력, 경력, 취미—은 나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갈망하는지, 어떤 순간에 진짜 내가 되는지. 이런 것들은 빠르게 답할 수 없다.


자기 이해는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질문하고, 답을 찾았다가 다시 의심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이 느린 작업은 사치처럼 느껴진다. 자기를 돌아볼 시간보다 다음 할 일이 먼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면서도 공허함을 느낀다.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속도가 삼킨 것은 세상에 대한 깊이만이 아니다. 나 자신에 대한 깊이도 함께 삼켜졌다.




속도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 있다. 모든 것을 느리게 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속도는 도구이고, 도구는 쓸모가 있다.


하지만 도구가 주인이 되면 문제가 생긴다.


속도가 기본값이 되고, 느림이 예외가 되면.

빠른 것이 항상 좋은 것이 되고, 느린 것이 항상 고쳐야 할 것이 되면.

그때 우리는 깊이를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잃는다.


어떤 것들은 느려야 한다. 어떤 이해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는 오래 걸려야 쌓인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필요할 때 속도를 늦출 수 있는 것. 그것이 깊이를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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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짜준 코드를 가끔 직접 뜯어본다.


생성된 로직이 돌아간다. 그런데 그 안에 AI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가능성들이 보인다. 이 방식 대신 저 방식을 썼으면 메모리를 덜 먹었을 거라든가, 이 구조가 지금은 괜찮지만 데이터가 늘어나면 병목이 될 거라든가, 이 라이브러리가 내부적으로 어떤 트레이드오프를 안고 있는지. AI가 깔끔하게 내놓은 정답이, 실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의 타협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깊이가 있다. AI의 즉답과 에러를 붙잡고 씨름했던 반나절 사이에 깊이가 있다. 그 깊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깊이 없이는 닿을 수 없는 곳이 있다.


속도가 데려다주는 곳이 있고, 깊이만이 데려다주는 곳이 있다.


둘 다 필요하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한쪽 방향으로만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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