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내려감의 미학

by 오롯하게

힘이 드는 순간들은 언제나 찾아온다. 영영 싸우지 않을 것 같은 친구와의 싸움, 사랑하는 연인과의 마찰, 하나뿐인 절친의 이민, 잘 풀려가던 일들에 대한 허망함, 갑자기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은 미래 등등. 이런 것들은 보통 아주 갑작스럽고 조심성 없이 우리에게 밀어닥친다. 그럴 때 나는 길을 잃는다. 감정과 생각들이 엉켜버려,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다스려야 할지 도무지 나아갈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감정적인 인간이라고 말해왔지만 이는 감정적이고 이성적이고를 떠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주체하지 못하던 카오스(chaos)를 빗어내리는 방법을 말하려 한다. 물론 나의 방법이다.


적는다. 그게 뭐든 그냥 적는다. 내가 느끼는 감정 생각 혹은 마음의 상태를 펜 끝에 맡긴 채 빈 종이를 선으로 가득 채우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단어들을 나열해 마인드맵을 그리기도 한다. 이 방법은 생각보다 쉽게 마음과 생각을 진정시켜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문구가 따로 있는데 이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때 혹은 도무지 해답이 보이지 않는 난관에 부딪혔을 때 주로 사용한다. 아래 문구는 류시화 시인의 '새는 날아갈 때 뒤돌아보지 않는다'에 나온 문구다.



'삶의 파도가 일어나고 가라앉게 두라. 너는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너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마음이 답답해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순간 펜을 들어 저 문구를 적어 내려 가기를 권한다. 분명 그대에게 밀어닥친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의 일부분이라도 잠잠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그저 내가 바다여서 생기는 자그마한 물결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리라. 물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적어 내림을 통해 진정시킨 마음으로 한발 물러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제는 보통 너무 가까이 부딪혀 보지 못하는 것들로 더 짓무르기 마련이니까.


저 문구뿐만 아니다. 각자가 스스로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문구 하나 정도는 책에서건 다른 매체에서건 발견 즉시 마음에 적어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마음에 와 닿는 문구나 대사들은 즉시 메모장에 옮겨놓거나 사진으로 기록하는 편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무너진 마음을 쌓아 올리는 데에 도움이 되니까. 찍어놓은 글귀의 사진이 위로 밀려 올라가도 언젠가는 보게 된다. 그때를 위해 순간순간 좋은 문구들을 기록해놓는 건 나에게 꽤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다.


아빠를 닮아 화가 나거나 뭔가 마음이 뒤틀리면 입을 꾹 다무는 버릇이 있다. 그냥 말이 섞기 싫어지는 경우도 있고,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려고 주춤대는 경우 혹은 서운하거나 화가 나는 감정이 너무 커져서 '왜 나는 기분이 상했는가'에 대한 답을 뒤덮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 점을 무척이나 괴로워하는 나의 과거 연인에게 한 번은 작은 쪽지에 나의 기분과 생각을 적어내려 전해준 적이 있다. 닥친 상황 속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푸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그게 잘 안 되는 나에게는 꽤 좋고 적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이 해결책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무언가를 펜 끝으로 적어 내려 간다는 건 나를 정리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펜을 놓을 수 없다. 늘 정리되지 않는 순간들 투성이니 말이다. 혹여나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에 혼란을 가지고 있다면 한 번쯤 본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적어내려가보길 바란다. 그 아름다움은 꽤 오래도록 지속될 거라 자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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