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알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왜 그럴까’를 반복하던 시절

by 은지

출근길 지하철에서 ‘퇴사’를 검색해본다. 검색결과가 한가득 쏟아져 나온다. 나만 이러는게 아니구나.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화면을 채운 답변들은 서늘했다.


‘쌩퇴사해도 될까요?’

‘병 걸린거 아니면 그냥 다니세요. 밖은 겨울입니다. 환승 이직이 답이에요.’


나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회사에 쓸 에너지를 남겨두어 뭔가를 준비할 여력도 없었다. 매일 120%의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면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왜 나는 잘 해내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게 더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계속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숨이 더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어 지하철 창문을 본다. 터널의 어둠을 배경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다. 흐릿하게 비친 얼굴이 내가 아닌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지하철은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내가 어디로 밀려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회사에 들어서면 나는 다시 '열심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없던 일도 만들고, 팀원들에게 우리 잘해보자고 기운을 불어넣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너무나 멀쩡해서, 다른 팀 사람들까지 종종 나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은지님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시니까요.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판단해 주실 것 같아서 조언을 구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단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 나는 그 역할을 잘 해냈다. 하지만 심장은 계속 뛰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하루에도 몇 번씩 상태가 달라졌다.


이 시기 내 일기장엔 ‘왜’라는 말이 가득했다.

2024.09.08 02:18
이상하게 불안하고 심장이 뛴다. 불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 나아지지가 않는다.
2024.09.19 23:14
지금 드는 이 우울감과 힘듦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이런 감정이 ‘왜’ 드는걸까?




이유를 알아야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심리상담을 예약했다. 본격적인 상담 전, 선생님의 권유로 MMPI(다면적 인성검사)를 진행했다. 며칠 뒤, 내 상태가 숫자로 찍힌 검사지를 마주했다.


“은지씨는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크네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도 강하고요.”


나는 그 말이 문제처럼 들리지 않았다. 잘 해내고 싶은 건 당연한거 아닌가. 괜찮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왜 잘못일까.


“사회적 불편감과 책임감 수치가 높아요. 잘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제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그렇군요. 생각해보면 나는 늘 다음 목표를 향해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잘했어? 그러면 다음에 이거. 이번에도 해냈어? 그러면 더. 멈추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로.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겉으로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만, 이미 바닥난 열의를 책임감으로 버티고 있는 상태라고.


“이 시기가 은지씨에게 새로운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도약을 할 때는 통증이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성장, 도전... 이런 말에 질려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참았던 진심을 툭 내뱉었다.


도약이요? 하기 싫어요.


무언가를 더 잘 해내고 싶지 않았다.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도약이 아니라, 그냥 편안해지고 싶었다.


“도약이라는 거창한 말을 쓰긴 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에요. 남의 인정이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인정해줄 수 있다면….”


선생님의 말이 흐릿한 수수께끼처럼 들렸다.


이유는 찾은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애쓰고 있었는지, 왜 멈추지 못하는지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정작 ‘나를 인정하는 법’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았다. 내가 나를 인정하기만 하면 이 기분 나쁜 심장 박동이 멈추는 걸까. 이해가 된다고 상태가 달라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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