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는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 찬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날에 남자친구와 호수공원을 천천히 한 바퀴 걷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출근길이 즐거운 때도 있었다고 했다. 지하철 앞 공원에 나무가 너무 예뻐서, 아침에 삼각김밥과 아메리카노를 먹는 시간이 즐거워서. 이유가 참 소박하고 귀엽다.
그런데 나는 한 번이라도 그런 날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출근길이 즐거웠던 날은 떠오르지 않았다. 13년 동안 기나긴 출근길을 수없이 오갔는데, 단 하루도 기억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거라고는 까만 지하철 도착 안내판, 환승이 가장 빠른 6-1 열차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나는 회사때문에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내 삶에서 즐거움을 기억하는 법을 잊은 채 달려온 건 아닐까.
그날은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한 지 꼭 6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있었다. 매일 퇴사를 생각하면서도, 왜 그만두지 못하는 걸까. 답은 단순했다. 미련이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에 대한 계산, 그리고 내 손을 거쳐 간 프로덕트들에 대한 애착. 입으로는 부질없다 말하면서도, 나는 그 시간들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정말 더 나아가고 싶었다면 그건 목표였겠지만, 멈추고 싶으면서도 붙들고 있었기에 명백한 ‘미련’이었다.
단순히 이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다음 직장이 아니라, 내 삶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절실했다. 어차피 언젠가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한다면, 하루라도 더 젊은 오늘이 낫지 않을까.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이 울타리를 나가도 되는 걸까.
“그만두면 후회할까 봐 두려워.”
내 말에 남자친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면 되잖아.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칫했다. 그러네, 그런 생각을 못해봤네. 그 순간, 길게 이어지던 고민의 끝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내 마음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시기가 언제냐의 문제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퇴사를 결심했다. 이 결심이 뭐라고 참 오래도 걸렸다. 처음엔 번아웃에 떠밀려 도망치듯 고민했지만, 이제는 달랐다. 도망이 아니라 내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번에는 성과가 아니라 시간을 선택하기로 했다. 나에게 시간을 선물하자. 잘해내지 않아도 되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결국 상사에게 내 결심을 알렸다. ‘저는 지금 나가야만 해요. 이 문제는 회사가 해결해줄 수가 없어요.’ 라고 까지 말하진 못했지만, 단순히 일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두고 고민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가 붙잡았다.
“딱 상반기까지만 더 해봐요.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말리지 않을게요.”
순간 가슴이 살짝 들떴다. 분명 확고하게 마음을 정했는데, 그의 부탁에 마음이 또 다시 흔들렸다. 정말 몇 개월만 더 해볼까.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고, 팀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잖아.
몇 개월 뒤의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 기회를 잡고 모든 게 잘 풀린 모습. 하지만 그 풍경 속에서도 나는 다시 ‘잘 해내는 사람’으로 돌아가서, 여전히 고민을 유예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다시 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아, 이렇게 힘들게 결심했는데도 흔들리다니. 그만큼 많은 것을 여기에 두고 가는 거구나. 아쉬워도 떠날 수 있는 거야. 이번에는 버티는 대신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