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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y 16. 2021

꼰대와 멘토 사이 독일의 알터 하제

때로는 정면돌파가 답일 때도 있다.


독일에서는 토끼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자주 쓰이는 토끼가 오스터 하제 부활절 토끼 그리고 알터 하제 우리말로 하자면 늙은 토끼 다.

독일에서 Ein Alter Hase 알터 하제 늙은 토끼는 직장에서 오래된 경력자 그 일에 있어 모르는 게 없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우리의 꼰대 또는 라떼말이야의 라떼 와 멘토의 중간쯤 된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그 직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 아무리 해도 모르는 일이 있어 선배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몇 년 차 일한 선배 조차도 잘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너도 몰라? 나도 몰라? 그럴 때 누군가 이야기한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알 거야 그에게 물어봐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알터 하제 거든.


그렇게 어느 직장이나 오랜 세월 그곳에서 터줏대감처럼 일해온 그 일에 있어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을 독일 사람들은 Alter Hase 알터 하제 늙은 토끼라 부른다.

그런데 그 경력 빠방 한 늙은 토끼가 모든 일에 있어 솔선수범하고 잘 모르는 것들을 후배들에게 친절이 전수해 주기만 한다면야 그야말로 멘토가 된다.

그러나 사람이 그 일에 있어 더 이상 모르는 것이 없다 보면 슬슬 꼰대 질이 하고 싶어 진다는 게 문제. 그래서 독일의 알터 하제는 꼰대와 멘토의 중간쯤 일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 병원에도 딱 요렇게 생겨 먹은 늙은 토끼 가 하나 있다. 이름은 CB 내가 부르는 닉네임 일명 씨불이.

처음부터 그녀와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제대로 밀어 붙였던 그날이 있기 전 까지는 말이다.



오랜 세월 프리랜서로 일해 왔지만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해서 일해 왔던 나는 팀으로 하는 일에도 자신이 있었고 나름의 친화력으로 새로 만난 사람들과 맞춰 일 하는 것도 잘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나의 친화력이 먹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출발되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도 말을 틀 수 있는 뻔치와 친화력도 팔월 삼복더위에 빙수 녹듯 녹여 버리는 그녀는 진정한 꼰대의 덕목 중에 하나인 똥고집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 병원은 가정의 병원으로만 3대째 60년 넘게 해오고 있는 병원인데 그중의 반이상 즉 30년 이상을 그녀 씨불이는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니 그녀는 이병원의 벽틈새에 구멍이 몇 개쯤 나 있는지도 알고 있을 경지 일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말이 모두 옳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나 쓸데없는 똥고집 일 때에는...


우리가 병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내 아무리 병원 일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지만 일에 있어 무엇이 효율적인 지 비효율적인지 구분은 할 수 있다.

놀랍게도 그때까지 그 병원에서는 정말 컴퓨터가 없던 시절 예전 그대로의 방법 대로 진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그때까지 예약환자 들의 이름과 시간들을 종이에다가 일일이 적어서 그날의 진료 스케줄 표를 작성하고 있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 세상에서 옛날 옛적이나 사용했을 손글씨 진료 스케줄 표 라니... 그것도 종이값 아낀다고 복사 잘못된 페이지 뒤집어서..

그손글씨 진료 스케줄표 들고 예약 환자가 진료를 위해 병원에 도착하고 대기실에 들어가면 그 환자의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는 앞쪽에 빨간색 볼펜으로 V체크를 한다. 

그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가면 그 이름 밑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반듯하게.. 내 고3 때 이후로 밑줄 긋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환자가 왔다고 미리 해서도 안되고 대기실에서 진료실로 입실을 해야 그을 수 있고, V가 이름 앞쪽이 아닌 뒤쪽에 쳐져 있어도 안된다.

만약 누군가 빨간 V를 환자의 이름 앞이 아닌 뒤쪽에 거나 환자가 아직 대기실에서 진료실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밑줄이 그어진 날이면 씨불이는 그걸 들고 누가 이랬냐며 순회공연을 다녔다.




나는 이 웃기지도 않은 것을 들고 나때는..을 외치는 씨불이와 매뉴얼이 짜증 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이미 전화로 진료 예약을 받을 때 환자 진료 번호, 이름, 예약 시간이 들어간 진료 스케줄 표를 컴퓨터로 작성한다 클릭 몇 번으로..

그런데 왜 그것을 인쇄해서 쓰지 않고 그걸 보고 손으로 적고 그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환자별 진료 카드를 서랍에서 그전날 식당에서 식재료 밑손질 두듯 예약 시간대 별로 꺼내서 한쪽에 쌓아 두었다가 환자가 진료실로 들어갈 때 가져가고 진료 후에 다시 서랍에 정리해 두었다 알파벳 순으로..

알파벳 이 아닌... A 다음에 B가 아닌 D로 시작하는 환자가 나와도 씨불이의 순회공연은 시작되었다.


요즘은 컴퓨터가 아닌 진료 카드에 진료 기록을 남기는 의사는 더 이상 없다.

왜? 이제 의사들이 진료 기록을 직접 컴퓨터에 기록해 두고 혈액 검사지 초음파 검사지 등도 종이 대신 모두 스캔해서 파일로 저장해 두고 데이터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용하지도 않을 진료 카드를 그전날 찾아다 쌓아 두어야 하며 다시 정리해야 하나?그것도 알파벳 순으로...

이건 마치 도서관에서 누군가 대여하지도 않은 책을 애써서 서고에서 찾아 두었다가 아무도 보지 않은 책을 다시 그 자리에 정리해야 하는 일인 게다.

더군다나 몇십 년 된 진료 카드들은 더 이상 카드가 아니다. 사진 앨범 또는 백과사전 두께라 서랍장에서 꺼냈다 뺐다 하는 것도 허리가 휠 지경이요. 그 시간이 왜 필요 한지 이 말도 안되는 매뉴얼이 늘 의문이었다. 오죽하면 병원 경력 10년이 넘은 직원 B는 자기가 수습일 때도 이렇게 일하는 병원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와 씨불이는 시시때때로 이 의문의 매뉴얼 때문에 티격태격 했다.

의문에 대해 씨불이가 답을 하기를 검소한 전통이라고 했다.

검소한 전통 같은 소리 하고 자빠 졌네..

전통이라 하면 내게는 된장, 고추장 또는 전통주를 담을 때 손쉬운 현대 방법 대신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들지만 예전 것을 그대로 유지해서 고유의 맛과 그 안에 담긴 소중한 철학을 지켜 내려 할 때나 사용하는 말이요 검소는 이런데 쓰라고 있는 말이 아니다.

이런 쓸데없는 매뉴얼대로 진료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늘 두 시간 이상이 별도로 소요되었다. 시간도 돈이다 검소를 말하려면 종이 한두 장이 문제가 아니라 매일 쓸데없이 허공으로 날려 버리는 두 시간을 이야기했어야 했다.

문제의 진료카드.. 두꺼운건 백과사전 두께다.

그래서 나는 우리 병원의 그 선사시대에나 있을법한 매뉴얼 들을 모조리 바꿔 버리기로 했다. 언제? 씨불이 없는 날.

첫째 그 손글씨 따박따박 쓰던 진료 스케줄표를 전면 없애 버리고 모든 스케줄표를 컴퓨터에서 바로 인쇄해서 사용했다.

둘째 환자 번호와 환자 이름을 보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던 진료카드는 서랍장에 고이 모셔 두고 서류 꽂아 쓰는 네모난 서류철에 환자 번호와 이름 그리고 진료 목적만 간단히 기록한 이름표를 포스트잇으로 붙여서 사용했다.


예약 환자가 오면 환자 번호 1234 홍길동 복통.이라고 쓰여 있는 간단한 판 데기만 진료실 앞에 두고 환자를 진료실로 안내하면 우리 병원 원장 쌤인 닥터 김이 진료실로 들어가며 포스트잇 만 딱 떼어 진료 책상 앞에 붙여 두고 컴퓨터에서 환자 데이터 찾아 진료 하며 바로 기록을 시작하면 되는 거다.

우리는 그 덕분에 두 시간 이상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고 직원들끼리 서로 커피 마실 시간도 확보했다.


자기가 없는 사이에 작업환경이 바뀌어 버린 씨불이는 아직도 내 방법이 마음에 안 든다고 뒷담화를 한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와서 친구 할 것도 아니고...

되지도 못한 것을 전통이라 우긴다면 그전통 새로 쓰면 된다.


만약,그때 내가 정면 돌파하지 않고 머뭇머뭇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우라질 빨간색 V와 밑줄 땡 그리고 허리 휘게 진료카드들을 나르며 아까운 시간을 아직도 허공에 날리고 있었을른지도 모른다.

때로는 정면돌파가 답일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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