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잔뜩 넣은 냉커피가 반갑던 여름은 이제 없다. 아! 가을 인가? 할 새도 없이 어느새 따뜻한 커피도 금세 식어 버리는 쌀쌀한 날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아침 출근길에 패딩을 꺼내 입은 사람들의 옷매무새가 그리 생뚱맞게 느껴지지 않는다.
독일의 가을 겨울은 습도가 높은 편이다. 회색 하늘에 비 내리고 물기 머금은 찬바람이 파고드는 날씨, 이것이 독일의 전형적인 가을 겨울 날씨 다.
물론 가끔 햇빛 나와주기도 하지만 일교차의 기복이 크다 보니 환절기 감기 환자가 급증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오며 환절기 감기, 장염, 코로나 가 골고루 뒤섞여 돌고 있는 때다.
우리 병원 직원들도 예외 없이 감기다 뭐다 세명이 차례로 병가를 내고 있어 두 명이서 나머지 일들을 나눠해야 하는 상황이다.
해야 할 업무는 많고 일손은 부족해 스트레스 지수가 저절로 쭉쭉 올라간다.
오전 진료 시간 만으로도 충분히 진 빠지던 어느 날 오후 진료 시간 때 일어난 일이다.
누군가 미친 듯이 병원 초인종을 눌러 댔다.
안 그래도 지치는데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거듭 귓가를 자극하니 짜증이 일었다.
독일의 개인 병원들은 안에서 문을 열어 줘야 들어갈 수 있는 곳들이 많다.
특히나 코로나 가 시작되고부터 우리 병원은 감기 또는 코로나 환자들은 밖에서 진료를 받아야 해서….
누군가 병원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면 의료진들이 밖으로 나가서 환자들을 확인하고 일반 환자들과 감염 환자를 구분하는 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환자들도 이제는 이 상황이 익숙해져서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린 후에 문에서 조금 떨어져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질 급하거나 참을성 없는 환자들이 가끔 초인종을 연거푸 누르기도 하고 문짝을 소리 나게 두드려 대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진료 차례가 빨리 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럴수록에 성질 만만치 않게 생긴 매니저가 안경 너머 싸늘한 눈빛으로 레이저를 마구 쏘아 대며 나와서는…
"초인종은 한 번만 눌러 주세요! 안에서도 다 들려요. 일하다 나오지 놀다 나오는 거 아니랍니다. 딩동 소리 나자마자 날아올 수는 없잖아요!"
라며 잔소리만 한 바구니 덤으로 안겨줄 뿐이다.
그날도 초인종은 한 번만 레퍼토리를 일절만 해야 하나 일절 까지 할까? 벼르며 병원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매우 난처한 표정을 한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긴 금발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쓰고 있던 안경은 코끝에 아슬아슬 걸려 있었으며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은 입고 있던 파란색 셔츠와 대비되어 더욱 빨갛게 보였다.
나는 초인종은 한 번만은 생략하고 빠르게 "”무슨 일이시죠? 어디가 안 좋으세요?"라고 물었다.
혹시나 응급한 상황일까? 싶어서였다.
그러자,
여자는 빨간 얼굴 보더 더욱 상기된 목소리로 "화장실 화장실 어딨어요?"라고 우렁찬 목소리로 다급하게 소리치는 게 아닌가.
아니, 여기가 무슨 지하철역 공중 화장실도 아니고 다짜고짜 화장실부터 찾다니 기가 막혔지만 다리까지 베베 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다른 의미의 응급함을 시사했다.
나는 일단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참을 인자를 마빡에 새기며 지금 당장 아주 곤란해 보이는 그녀를 화장실로 안내해 주었다.
사실 나도 밖에 나갔다가 종종 화장실 때문에 난처한 일을 겪다 보니 남의 일 같아 보이지 않아 충분히 그 급박함이 이해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공중 화장실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 시내나 큰 쇼핑센터가 아니라면 주택가 근처 상가에도 공중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많다.
손님용 화장실을 갖추고 있는 빵가게 나 카페들도 주택가 안쪽에는 찾을 수 없다.
즉 주택가 속으로 들어와 있는 우리 병원까지 걸어 들어오는 길 도중에는 공중 화장실이 아무 곳에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녀가 우리 병원 오는 길에 갑자기 화장실이 급한 경우였다면 정말 이지 싸기 일보 직전 일수도 있었다는 거다.
그러나 병원 화장실은 공중 화장실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주민들에게 열려 있지는 않다.
나는 그녀가 무슨 일로 우리 병원을 방문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화장실 갈 때 마음과 다녀와서 마음이 다르다는 옛말이 생겼던가? 싶게 조금 전과는 완전 다른 모습의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딴사람이 된 그녀는 정리된 모습으로 차분히 말했다 "화장실을 일이 분에 한 번은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환장할 지경이에요!" 그녀의 병원 방문 이유인즉슨 하루 종일 화장실을 가고 있다는 거다.
그런 증상으로 가장 흔한 것 중에 하나가 방광염이다.
그럼 소변 검사를 먼저 해야 하는데 남김없이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 나온 환자는(그녀에서 환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짜낼 것이 없다고 했다.
나는 어이없는 웃음을 갈무리하고 "그러게 증상을 먼저 이야기하셨으면 소변 검사부터 해드렸을 텐데 어쩔 수 없죠 기다리셨다가 화장실 다시 다녀오세요!" 라며 친절히 소변 검사에 대해 안내해 주었다.
그날 병원 복도에서는 그 환자가 "안 나와요! 아까 조금 남길걸 그랬어요!" 라며 화장실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메들리 노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상상되게 적나라한 소리에 누구랄 것 없이 직원들도 환자 대기실과 진료실을 오가던 환자들도 모두 병원이 떠나가라 웃었다.
To 애정 하는 독자님들
초록의 도토리가 노랗게 그리고 갈색으로 익어 가는 가을입니다.
우리 애정 하는 독자님들 잘 지내고 계십니까
깊어 가는 가을을 아껴 가며 보내고 싶은 김 자까 독일에서 인사드립니다.
글에도 나와 있듯 병원 일로 너무 바빠서 머릿속에는 꾸준히 글감들이 떠다니는데
그걸 퍼낼 시간이 도저히 없었답니다.
그래서 작가의 서랍에 짬짬이 이야기들의 제목만 적어 냉장고에 밑반찬 저장해 두듯
놓고 때를 기다렸습지요.
이제 드디어 조금 여유가 생기네요
왜냐하면 이번 주는 롱 위크엔드랍니다. 한국도 월요일 개천절 공휴일이라 황금연휴이지요
독일도 10월 3일 월요일이 통독 기념일이라 공휴일이에요.
그 시간 동안 하고 싶어도 미뤄 두었던 일들을 해볼 예정입니다.
그중에 일 번이 글쓰기 겠지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여행기도 일상의 이야기들도 하나 둘 쓸 수 있는 만큼 써 보렵니다.
달콤한 커피 한잔 끓여 두고요.
모두 환절기 감기 조심들 하시고 향긋하고 낭만적인 가을날 되시기를 바라요